등소평의 공칠과삼(功七過三)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1/12 [23:04]

등소평의 공칠과삼(功七過三)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1/12 [23:04]



모택동(마오쩌둥.毛澤東)과 등소평(덩샤오핑.鄧小平)은 현대 중국을 만든 주역들이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시기에 등소평은 반동분자라고 하여 모택동에게 온갖 핍박을 받고 고초를 겪었다. 그러다가 등소평은 모택동 사후에 집권하게 된다.

당시 등소평은 모택동에 대한 평가로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고 했다. 잘한 공은 칠(七)이요 잘못한 과는 삼(三)이라는 말이다. 원래 공칠과삼(功七過三)은 공로와 허물이 반반이라는 공과상반(功過相半)을 응용한 말이다. 모택동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음에도 모택동의 업적과 잘한 부분에 대하여는 인정을 한 것이다.

중국은 음수사원(飮水思源)과 관시(關係)의 나라로 평가된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은 우물물을 마실 때 그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하며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번 맺은 인연을 끝까지 간직한다는 의미다. 사원(思源)은 음수사원(飮水思源)에서 따온 단어이다.

지난 2014년 8월 22일 등소평 출생 11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 사천성 광안(廣安)시 중심의‘사원(思源)광장’에는 등소평 추모객들이 운집했다. 거리에는‘등소평, 감사합니다(感恩小平)’를 적은 붉은 현수막이 걸렸다.“중국이 잘 살게 된 것은 등소평 덕이다(感謝致富鄧小平)”는 펼침막과 광고판이 즐비했다.

등소평의 고향 광안 시민들은 14억 인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 강대국의 기틀을 닦은 등소평의‘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원(思源) 광장을 조성했다. 중국의 인민들은 5척 단구 등소평 덕(德)에 잘 살게 되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

‘중국을 건국한 사람은 모택동이고 중국을 건설한 사람은 등소평이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다. 중국인들은 모택동(毛澤東)이‘산(山)’이라면 주은래(周恩來)는‘물’이요, 등소평은‘길’이라고 말한다. 모택동이 비바람에 맞서 우뚝 선‘산’이라면 주은래는 공평무사하게 흐른‘물’이다. 반면 등소평은‘산’과 ‘물’을 넘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길’을 닦은 지도자란 이야기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중국 지도자의 명(明)과 암(暗)을 함축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인물 평가는 명(明)과 암(暗), 공(功)과 과(過)까지 모두 아우른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공칠과삼(功七過三)이다.

1981년 6월 27일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는 역사결의(歷史決議)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역사결의(歷史決議)는 건국 이래 당(黨)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를 말한다.

이 역사결의는‘모택동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의 극좌(極左)노선을 부정하고 등소평 체제를 확실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놓으면서 오늘의 중국을 경제 제일주의 길로 이끈 역사적 문헌으로 평가받고 있다.

1976년 사망한 모택동은 오랜 세월에 걸친 우상화 작업으로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창업 황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등소평은“모택동 동지의 공과(功過)에 대해 적절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모택동 동지가 만년에 이르러 사상에 일관성이 없고 어떤 이야기는 서로 모순된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실제로 모택동은 문화대혁명 이전의‘대약진운동’에서도‘결정적 과오’를 기록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운 국가 주석 모택동은 당시 세계 최강국인‘영국을 추월하자’를 내걸고 농촌 제철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중단하고‘협동농장사업’과‘토지개혁 운동’을 실시하며 식량 증산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공산주의 산업화 정책을‘대약진운동’이라 명명(命名)했다. 1958년 사천성의 한 농촌을 방문했던 모택동은 벼 이삭을 쪼아 먹는 참새 떼에 대해‘해로운 새’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 뒤‘참새잡기 전쟁’이 선포됐다. 북경(北京)에‘참새 섬멸 총 지휘부’가 신설되고‘참새가 곡식수확에 미치는 영향’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중국 22개 성(省)에 생존하는 참새들 때문에 해마다 70만4000여명의 일 년치 식량이 사라진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참새 소탕 작전으로 하루에 참새 8만 마리 이상이 사라졌다. 모택동은 참새 소탕 일일 보고를 받고 농산물 수확량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해충(害蟲)의 천적인 참새가 소탕되자 해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해충 떼가 농작물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수확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모택동은 자신의 판단 착오를 인정하지 않고 참새 소탕 작전을 계속 밀어붙였다. 4년간 진행된 이 작전으로 곡물 수확량이 급격히 줄어 4000만 명이 굶어죽었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은 세계 역사상 최악의 대기근을 유발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역사결의(歷史決議)를 통해 모택동의 행적을 평가했다.‘그의 공(功)은 일곱 가지이고 과(過)는 세 가지이다. 그런데 공이 과보다 크기 때문에 그를 중국 현대사의 최고 지도자로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중국의 대통합’을 도모했다. 한편 등소평에게도 정치개혁을 요구하던 대학생들을 탱크로 밀어버린 천안문(天安門) 사태가 과오로 남는다.

사람을 볼 때는 긍정과 부정을 다 봐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잘못한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 모든 것을 잘 한 사람도 거의 없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 뿐 잘못한 부분도 있고 잘한 부분도 있다. ​그런데도 대개는 무조건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긍정적인 면 보다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부정적인 평가만 내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평가하고 그 배경과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이를 오히려 활용해 가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누구에게나 단점과 약점이 있다.

공인의 경우 공과 과를 분명히 가려서 공정한 평가를 내려 후세에 전해야 한다. 세계에 어떤 통치자도 공적(功績)과 과오(過誤)가 없는 지도자는 없다. 시대와 개인의 평가에 따라 같은 인물이라도 공칠과삼이 되거나 공팔과이(功八過二)가 될 수 있다. 특히 큰 인물일수록 평가가 엇갈린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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