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을 넘어 통일로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북한의 피의 숙청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1/31 [16:06]



정적이나 반대파를 살해하는 방식의 숙청을 흔히 '피의 숙청'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인 '피의 숙청'은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마오쩌둥 시대 중국, 폴 포트 정권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자행됐다. 이들 숙청에서는 수천만 명이 실제로 살해당하거나 정치적인 죽임을 당했다.

숙청은‘공포정치(La Terreur)’의 강력한 수단이다.‘라 떼뤠’란 프랑스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슬로건으로 이에 반대하는 정적이나 반혁명 세력을 철저하고 잔인하게 죽였다.

혁명을 명분으로 권력 유지를 위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공포정치 때부터 생겨난 말이다. 로베스피에르 이후 공포정치와 숙청은 전 세계 독재 권력자의 전유물이 된다. 볼셰비키 공산 혁명 이후 소련을 장악한 스탈린의 숙청은 규모나 방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스탈린 집권 동안 4500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 월 평균 4만 명이 처형됐다는 기록도 있다. 스탈린은 1940년 그의 최대 정적인 레온 트로츠키를 멕시코까지 추적해 잔인하게 암살하기도 했다.

북한 김정은은 집권 2년째가 되면서 숙청의 피바람을 몰고 왔다. 김정은은 40여 년간 권력의 중심부에 있던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했다. 측근인 리룡하 당중앙위원회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도 공개 처형했다. 월권, 분파행위 등의 죄목으로 처형을 시킨 것이다.

인민무력부장이자 군 서열 2위인 현영철도 고사포로 공개 처형했다. 죄목은 지시 불이행에 따른 반역죄다. 그러나 김정은이 참석한 한 모임에서 그가 졸았고 말대꾸를 한 것에 발끈했다는 것이 사형 이유다. 6개월 사이 마원춘, 변인선, 한광상 등 인민군과 당에서 김정은을 보좌하던 최측근들도 갖가지 괴상한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북한의 숙청은 이미 김일성 때부터 시작됐다. 김일성은 1956년 이른바‘8월 종파 사건’, 1967년 ‘갑산파 사건“ 등을 통해 자신의 1인 체제 구축에 반대하던 인물들을 숙청했다. 김두봉. 최창익. 박창옥. 박금철. 김도만. 이효순 등 연안파와 친소파, 갑산파를 숙청을 통해 차례로 제거했다.

그의 친동생인 김영주마저 자신의 진로에 방해가 된다고 숙청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갑산파 사건’을 주도했다. 김정일도 권력을 잡은 1974년부터는 세습 권력 구축에 저해되는 세력을 무지막지하게 제거한다.

김정일은 1997년 서관희 당 농업비서를 간첩죄로 몰아 공개 처형했다. 주민 수백만 명을 굶어죽게 한 고난의 행군 시기는 김정일 식 공포정치의 또 다른 방법이다. 김정일도 20세기 어느 독재자 못지않게 권력욕이 강했고 냉혹하며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직 후계자였던 시절, 자신의 권력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자신의 작은아버지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및 김영주와 가까웠던 자신의 이복형제들을 숙청하며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김정일은 무력을 써서 정적들을 제거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에게 김영주와 이복형제들을 모함하여 김일성의 손으로 평양에서 몰아냈던 것이다. 영화를 전공했던 그는 표절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뛰어난 연출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혁명 원로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김정일은 흉폭성은 매우 잔인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정일 집권기 최대의 숙청 사건으로 불리는 심화조 사건이다. 당시 1990년대 북한을 들이닥친 흉년과 경제난으로 김정일의 권력 기반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김정일은 권력 구조의 불안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김정일이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마오쩌둥의 펑더화이 숙청, 그리고 김일성의 김창봉 숙청 등의 전례였다. 정책의 실패를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수법이었다. 이 거대한 계책을 실현에 옮기기 위해 김정일은 자신이 신임하는 부하를 불렀다. 그가 바로 장성택이다.

피의 숙청을 자행한 독재자들의 말로는 비참하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정적 제거에 활용했던 기요틴(단두대)에서 처형됐고, 스탈린 또한 사후에 혹독한 비판과 함께 단죄를 받았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그랬고,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도 부인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사담 후세인과 가다피도 그 종말은 처참했다.

한편 김정은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 백두산을 찾았다. 그는 집권 후 5번 백두산을 찾았다. 가장 처음은 2013년 11월 29일이다. 당시 그는 양강도 삼지연 백두산 지역의 한 별장에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실각과 관련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실행 계획을 세운 뒤 이 계획을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이어 다음날인 30일 장성택이 맡고 있는 8개 직위를 모두 박탈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보름 뒤 장성택은 처형됐다. 2014년 11월에는 김정일 3주기 탈상을 앞두고 최측근들과 함께 백두산을 찾아 국정 운영 방향 구상을 했다.

2015년 4월 18일에는 공군 비행사들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등반에는 황병서·최룡해·김양건·리재일·리병철 등이 동행했다. 2017년 12월에는 최룡해 등 측근과 함께 백두산에 갔다.

이 때 김정은은 백두산 사적비와 교양마당을 잘 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친필인‘혁명의 성산 백두산’을 언제 어디서나 잘 보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백두산은‘백두혈통’으로 불리는 김일성 일가의 상징으로 통한다.

김일성 일가는 김일성 주석이 백두산을 거점으로 삼아 항일 유격 활동을 벌인 것을 체제의 당위성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의 출생지를 백두산 삼지연군에 속한 백두산 밀영이라고 주장하며 이곳을‘혁명 성지’로 꾸며놓기도 했다.

이곳은 천연 요새로 불릴 정도로 깊은 오지에 자리 잡고 있고 기계 장비가 접근하기에도 매우 어렵다. 이 때문에 이곳 건설은 거의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실제 김정일 출생지는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라는 게 정설이다.

(정복규 기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9/01/31 [16:0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