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과 중일전쟁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2/24 [16:55]

장개석과 중일전쟁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2/24 [16:55]



장개석(장제스)은 청나라 말기인 1887년 저장 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군벌이 득세했다. 그는 군사력을 갖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1906년 바오딩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듬해에는 일본의 육관사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 시기에 도쿄에서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09년 졸업 후에는 일본 제국군에서 잠시 복무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후 귀국한 그는 당시 국민당 인사 중 흔치 않은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경력으로 혁명군을 이끌며 쑨원의 눈에 들게 되었다.

이후 1918년 쑨원과 부인 쑹칭링을 암살 시도에서 구해내면서 정식으로 쑨원의 휘하에 들어갔다. 쑨원이 코민테른의 지시 하에 국공합작을 결정할 때 소련에 파견되어 트로츠키 등 코민테른 지도자들을 만나고 군사 자문을 얻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쑨원이 혁명군을 키우기 위해 세운 황푸군관학교에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곳에서 장제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군관들이 양성되었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사망하자 국공합작으로 국민당 내에 유입되었던 공산당 세력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국민당은 공산주의자들이 규합한 좌파와 쑨원을 계승한 우파로 분리되었다. 쑨원의 계승자임을 자처한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부하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국민당 내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이듬해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청나라 말기부터 중국 각지에서 득세한 군벌들을 척결하기 위해 북벌(北伐)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당 좌파까지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장제스는 1927년 4월 12일 제1차 국공합작을 깨고 상하이에서 대대적으로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를 숙청했다.

이 사건이 상하이 쿠데타다. 공산주의 세력을 일거에 소탕한 장제스의 다음 목표는 중국 통일이었다. 1928년 6월 장제스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난징에 새로운 국민당 정부를 수립했다. 장제스는 국가 주석 및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이어 공산주의자와 좌파 인사들을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이 시기에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쑹메이링(宋美齡)과 결혼하면서 쑹(宋) 가문의 힘까지 등에 업게 되었다.

당시 장제스 정부가 당면한 문제는 만주를 점령하고 중국으로 침범할 야욕을 비치는 일본과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는 공산당이었다. 장제스는 중국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에는 외교 협상을 통해 장기적으로 대응하고, 먼저 국내의 공산당 세력을 척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거부감을 일으켜 중국 내에서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일본의 공격으로 만주 지역을 잃은 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 역시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장쉐량은 장제스 휘하에서 동북군 원수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공산당과의 대립인 국공내전보다 외세에 대항한 항일 구국 운동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항일 투쟁에 소극적인 장제스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936년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고, 중국 전역에서 반일 감정 역시 높아졌다.

그러나 장제스는 직접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산당 토벌을 준비했다. 내전에 반대하는 동북군 지휘관들까지 교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장쉐량을 주축으로 한 동북군은 12월 12일 시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장제스를 체포하여 감금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장제스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난징 정부의 개편, 내전 중지, 무력 항일 투쟁, 쑨원의 유지 이행 등을 내걸었고, 장제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1937년 7월 7일 펑타이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진지에서 야간연습을 하던 중에 사병 한 사람이 약 20분간 행방불명되었다가 복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이 사건을 중국군에게 사격을 받았다는 것으로 확대해 다음 날 루거우차오 다리를 점령했다. 이 사건은 사흘 후 일단락되었으나 일본이 그해 12월 13일 난징 대학살을 자행하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장제스는 다시 공산당과 협력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다. 그러나 일본군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난징에 이어 우한마저 내주며 쓰촨 성으로 후퇴했다. 이어서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진주만을 공격했다.

중일 전쟁이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중국은 태평양 전쟁과 일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에서 미국, 영국 등 서구 열강들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무력 응징과 일본 축출이 결의되었다.

장제스는 일본의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으나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중국 내에서 일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거듭된 전쟁으로 중국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높아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과 또다시 내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국민당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공산당은 이미 농촌 지역을 개혁하면서 많은 농민들을 공산당으로 끌어들인 반면, 국민당의 군사력은 전쟁을 겪으면서 매우 취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린뱌오, 주더 등의 활약으로 공산당군은 심양, 장춘, 난징 등을 점령했고, 결국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탈출했다. 결국 중국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장제스는 1949년 12월 국민당 정부를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옮긴 후 중화민국을 설립하고, 중화민국 총통 겸 국민당 총재로서 타이완을 지배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에 대해 산발적인 공격을 계속하며 계엄을 유지했다. 그런 한편 미국의 원조를 이용해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여 토지 개혁과 통화 안정책 등을 실시하고 각종 근대화 개혁을 시행하여 타이완을 현대 국가로 발전시켰다. 1975년 그가 사망한 후 아들인 장징궈(蔣經國)가 총통이자 총재로서 그 뒤를 이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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