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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의 역사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5/09 [14:54]



38도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소련군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분계선으로 구획되었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열강에 의해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된 것이다. 1945년 8월 9일,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둔 시기에 소련은 뒤늦게 대일전에 참전하여 150만의 병력으로 만주와 한반도 동북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소련군은 8월 11일에 웅기를 점령하고, 12일에는 청진과 나남을 점령하였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는 8월 21일 함흥과 원산에 들어왔고, 23일에는 개성에, 24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한편 미군은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하였고, 9월 9일에 일본 총독으로부터 서울에서 항복을 받았다.

미군은 9월 13일에 개성에 진주하였고, 16일에는 부산에, 27일에는 전주에, 그리고 10월 5일에는 광주에 진주하였다. 결국 자연스럽게 북한에는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었고, 남한에는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를 냉전 대립의 격전장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 후 북한의 각도에서는 자연 발생적으로 자치조직이 만들어졌다. 이 는 건준의 지방지부가 되었고, 점차 행정기능도 확충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 후에는 각도마다 인민위원회로 재조직되어 총독부 체제의 도청 기능을 인수했다. 소련군은 남한의 미군과는 달리 조선인에 의한 인민위원회를 행정의 추체로 삼는 분할통치의 방법을 취했다.

최초의 인민위원회는 민족계와 공산계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공산계가 다수파인 건준계로부터 주도권을 탈취했다. 표면적으로는 조만식이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으나 공산계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조만식의 온건 노선은 차츰 소련 점령군에 의해 봉쇄되었다. 대신 등장한 인물이 바로 소련군 장교였던 김일성(金日成)이다.

애초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부위원장은 서울의 중앙 조선공산당에서 파견한 현준혁(玄俊赫)이었다. 그러나 현준혁은 위원회가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3일 괴한의 총을 맞고 암살되었다. 공산계 지도자가 부재한 가운데, 김일성은 9월 19일 소련의 수송선을 타고 원산에 상륙한다.

김일성은 10월 14일 '소련해방군 환영 평양시민대회'가 개최된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처음으로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기로 전해 오던 항일의 영웅, 김일성 장군보다 너무나 젊은 김일성의 서툰 연설에 청중들은 실망했다. 그러나 이미 소련군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서 추대했다.

김일성 세력은 박헌영이 이끄는 공인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이탈을 꾀하기 시작한다. 10월 23일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가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서 승인되었다. 이는 마침내 '조선노동당'으로 발전해 나갔다. 각도 인민위원회의 조정기관으로서 '북조선 5도행정국'이 11월 19일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12월에 미 · 영 · 소 3국의 외상이 참가한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과도정부의 수립과 최장 5년간의 신탁정치가 결정된다. 소련은 신탁통치 동안 소련의 특유한 정치공작을 통해 한반도에 통일된 공산 정권 수립을 획책한다. 결국 소련군은 민족계 조만식이 주도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저지했다.

이듬해 1946년 2월 8일 소련군이 공인한 잠정적 통치 기관으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김일성이 주석으로 취임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소련은 처음부터 정당이나 행정조직도 남한과는 전혀 다른 북한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

구소련이 해체된 후 공개되어 발견된 문서에 의하면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은 제1극동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지령을 내렸다. 그는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과 조직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을 지시했다.

비록 잠정적이란 꼬리표를 달았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이 지령에 따라 '광범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권'이었다. 이 위원회의 이름으로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국유화한 다음 농민에게 경작권을 배분하는 급진적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토지개혁까지 할 수 있는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사유재산을 몰수했다. 남북 분단의 단초를 열게 된 것이다.

1946년 6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나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수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비판적인 정치세력들은 이승만의 이 발언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남북 분단의 단서를 연 것으로 비판한다. 그러나 당시 국제적으로 동서냉전이 깊어 가고, 국내적으로는 북한에서 인민위원회에 의한 단독정부가 실질적으로 수립된 상황이다. 남한에서도 불가피하게 그에 따르는 대응을 하자는 뜻으로 올바르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란 말이 유행했다. 대한민국은 미제의 괴뢰 정권인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통 정부로 몰아가려는 불순한 의도였다. 미국과 소련은 양국의 사전협약에 따라 남북한에 진주한 것에 불과하다. 점령군이나 해방군은 그들 스스로 붙인 진주군의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다.

미국이나 소련이 일본과 싸운 것은 조선의 해방이 목적이 아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항복에 따른 전후 처리 차원에서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조선의 해방이 목적은 아니었다.

해방은 일본의 항복으로 일제의 압제가 풀어졌다는 의미다.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는 일제의 항복에 따른 전후처리에 불과하다. 소련이 조선의 해방을 위해 북한에 진주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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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09 [14:54]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