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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촌 김성수일가의 비화(秘話)
동아일보 초대회장 박영효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5/10 [14:23]



인촌은 경성방직 공장장 이강현(李康賢)이 방직기계 구입 차 오사카에 보냈는데 삼품거래(三品去來)라는 투기에 손을 댔다가 거금 10만엥의 손해를 입혀 가산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이 사정을 고해들은 인촌의 양부 기중공은 마지막 땅문서를 주어 조선식산은행에 잡혀 8만엥을 융자 받았는데 그 때가 1920년 7월이었다.  거기에 다가 그해 동아일보 창간을 위해 인촌은 주식을 모우고 거의 바닥이 난 김씨 일문의 남은 돈을 쏟아 부었다. 그 때 인촌의 나이 30세로 인촌은 그 때의 심경을 친구 고희동에게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탄압은 심각하고 경제는 한이 있는데 아니 할 수도 없고 길은 까마득하다. 부여조(父與祖)가 모아놓은 재산을 소진하고 아무것도 이루는 것이 없다면 사람으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라며 인촌은 눈물을 머금었다-동아일보 1955.2.25. 인촌 김성수전 P.171인용)

그 당시 동아일보 창간은 사이또오(齊藤實)총독의 문화정치에 따른 일대 모험이기도 했다.

인촌은 경성방직 초대회장에 3일 천하 갑신, 갑오개혁의 영수 박영효를 내세웠다.

박영효(박(朴泳孝1831-1936)는 1872년(고종 9년) 13세에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 정일품 상보국승록 대부가 되었으나 3개월 만에 영혜옹주와 사별하였다. 1870년 중반 박영효는 큰형을 따라 박지원의 손자 부안현감과 평양감사를 지낸 박규수(朴珪壽)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역관 오경석, 승려 이동인, 의관 유대치 등 북학파의 사상을 이은 개화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결과 1879년경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등과 19세의 약관에 개화당을 만들었다. 1882년에 군인들의 급료로 모래가 섞인 쌀을 배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박영효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제3차 수신사로 일본에 건너갔다.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며 일본 정가를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외교관을 만나 국제 정세를 살피는 한편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본 그는 선각자가 되었다. 박영효는 대신 직에서 제외되어 한성판윤으로 있으면서 박문국, 순경부 치도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고 도로를 정비하였으며 신식 경찰 제도를 도입하는 등 개화정책을 펼치려 했으나 수구파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박영효는 1884년 김옥균,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민태호 등의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배신과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한 박영효(朴泳孝)는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 만 했다. 1882년 도일(渡日) 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의 태극기 4괘(卦)의 좌·우를 바꿔 재 도안한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 1894년 갑오혁명이 일어나자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무능한 군주와 수구파에 몰려 개화파들과 함께 또다시 일본으로  쫓겨 갔다. 귀국 후 일제 강점기 초반에는 기업과 은행 활동에 전념했으며, 이후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고문도 지냈다. 19세기 말 미개한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 몸부림친 개화사상가(開化思想家)이며, 정치가였던 그는 부마라는 신분에 의해 고위 관직인 한성부판윤을 지냈는데, 민씨 척족들의 견제를 받아 3개월 만에 경질되기도 했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개혁하여 외세와 맞서려는 개화파의 영수 박영효는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을 보고 통곡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과 초대총독 이등박문이 조선에 부임한 인촌가가 줄포로 이사 한 1907년에 다시 귀국 후 궁내부대신이 되었으나 수구파 등살에 7일 만에 물러난다. 1909년 이등박문이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저격당한 10년 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제3대 총독 사이또오 마꼬도(齊藤實)총독은 문화정치를 펴며 일제가 주는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는 중추원 부의장까지 올랐다. 박영효는 조국근대화와 개방개혁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는데 조선조 500년은 이미 썩고 낡은 수구매판세력 때문에 애석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의 국부라 부르는 손문(孫文)이 주도한 1911년 신해혁명보다 갑신정변이 무려 반세기나 앞선 혁명으로, 을사늑약의 해 1905년 손문이 일본 도쿄에 10여 년 간 망명 중 중국 혁명동맹회를 결성했는데, 진시황 이후 2100년간의 왕조를 뒤엎는 삼민주의가 곧 지도이론으로 발전했다. 국운이 다한 조선조를 목숨을 걸고 혁신을 하려다가 실패를 한 박영효! 박영효는 인촌보다 30세나 위인 원로급 유명인사로 1920년 김성수가 주도한 동아일보 초대회장에도 취임을 한다. 1939년 79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혁명에 실패한 풍운아 박영효에 대한 역사의 거울은 어떻게 비춰질지는 후세의 사가들의 몫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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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10 [14:23]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