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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공산당 결성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5/16 [16:48]


설명-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연안파 정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 주석단. 오른쪽 부터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련군 소장, 김두봉, 김일성, 박정애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한반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서둘러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회는 서울에 있었고 지도자는 박헌영이었다. 한반도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할 점령 초기에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도 남한에 있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도를 받았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파의 주도로 1945년 10월 평양에서 결성한 공산주의 조직을 말한다. 후에 명칭이 북조선공산당으로 바뀐다. 당시 소련군정과 김일성 일파는 서울의 조선공산당과는 별도로 북한지역을 지도할 '중앙지도부'의 결성을 구상했다.
그러나 일국일당원칙(一國一黨原則)을 내세운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결국 논란 끝에 절충안으로 중앙당에 속하되 북한의 공산당조직을 지도할 수 있는 기구로서 북조선분국을 설치하자는 제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10~13일 평양에서 정식 대표 57명과 방청자를 비롯해 약 18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 마지막 날인 13일 북조선분국을 정식으로 결성했다. 10일 후인 10월 23일 서울의 중앙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대회에서는 분국 설치와 함께 지도 기관을 구성했다. 책임비서에 김용범, 제2비서에 국내파인 오기섭과 연안파인 무정을 각각 선출했다. 김일성은 17명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책임비서에 선출되지 못했다. 핵심 측근인 김책·최용건 등도 집행위원 명단에서 빠졌다.
당시 소련군정 정치사령관이던 니콜라이 레베데프는 김일성이 "정치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가 전면에 내세우기에는 시기상조였다"고 밝힌다. 특히 레닌 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준비가 덜되었을 뿐만 아니라 빨치산 활동 이외에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입국도 하지 않은 무정(1945. 12 입국)을 제2비서에 선출한 것은 연안파 포섭을 위한 배려로 분석된다.
북한을 점령 통치하게 된 소련군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서울에 있는 지도부의 명령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공산당 조직을 북한 지역에 결성하도록 지도했다. 그리고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자 조직이 소련군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복종하기를 원했다.
소련군은 김일성과 김책 등 일제 말기 시베리아에서 소련군에 편입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박헌영과 관계가 좋지 않은 북한 거주 공산당원들을 지원하여 북한 지역의 독립적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도록 공작했다. 소련군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 김일성파의 세력이 우세해지도록 공작했다. 결국 1945년 12월 17일과 18일 북조선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도록 지도했다. 그 회의에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김일성의 책임비서 선출은 소련군의 지시에 적극적으로 복종하는 세력이 북한 지역 공산주의자 조직을 보다 확고하게 장악하도록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이 회의에서 책임비서 김일성은 북한 지역에 완전히 독립된 당 중앙기관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부터는 조직의 명칭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아닌 북조선공산당으로 변경하자고 제의했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그러한 명칭 변경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김일성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파 간의 격론 끝에 소련군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파가 국내파를 제압하고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결의 후 두 파간에는 격렬한 갈등이 야기된다.
소련군은 그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김일성파로 하여금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의 사용을 당분간 보류하도록 조정했다. 소련의 조정에 따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12월 북한 지역의 공산주의자 조직의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결정해놓고도 그것을 공식 명칭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북한의 언론 매체에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46년 4월 19일이다. 이날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소공동위원회의 5호 성명에 대한 북한 공산주의자 조직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공식 사용되었다.
북조선공산당은 당세를 확장하고 대중정당화하기 위해 1946년 8월 그해 초 북한 지역에서 창당된 모택동 노선의 공산당인 조선신민당을 흡수 통합하여 북조선노동당이 되었다. 1946년 3월에 시행된 토지개혁을 통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이라는 광범위한 지지 세력을 얻어 당의 규모를 확장시킬 수 있었다.
토지 개혁이 끝난 직후인 4월 초순부터「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라는 명칭이 슬그머니「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46년 봄부터 미군정의 대대적인 탄압에 직면하게 된 남한의「조선공산당」은 당 중앙으로서의 유명무실한 지위조차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1946년 2월 26일 중국에서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 투쟁과 동시에 중국 혁명에 참여했던 한인 공산주의자들, 즉 무정 김창만 허정숙 박일우 김두봉 최창익 한빈 등 이른바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조직인 「독립동맹」을 정당의 형태로 바꾸고, 그 명칭을 조선신민당으로 정했다. 조선신민당이 창당된 이래 공산·신민 양당은 끊임없이 통합을 추진했다. 마침내 7월 29일 신민당 위원장인 김두봉이 공산당 책임비서인 김일성에게 제청하는 형식으로 양당 합당을 위한 연석 중앙확대위원회가 열려 합당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8월 28일「조선로동당 창립대회」가 개최됐다.
이 대회에서 김두봉은 북로당의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연설 말미에서「김일성 장군 만세」라는 구호를 집어넣었다. 김일성은 국내파 공산주의자인 주영하와 함께 부위원장에 선출됐다. 북조선노동당의 창립은 김일성 권력의 최종적인 봉인인 셈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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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16 [16:48]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