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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일가의 비화(秘話)(11)
동아일보와 춘원 이광수(1892-1950)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6/14 [10:06]


1924.1.2일부터1월6일까지 5회에 걸쳐 연재된 유례없는 장문의 사설은 동아일보가 그동안 조선총독부와 민중 사이를 오락가락 하면서 서투른 곡예의 종지부를 찍고서 총독부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일종의 고지문 이었다. 이 사설을 쓰기 위해 1923.10월에 그 당시 촉탁 기자였던 춘원 이광수는 중국 북경에 보내 도산 안창호의 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설의 요지 1차는 ‘민족백년 대계의 요(要)’로 민족의 뜻이 응집된 원대한 계획이 필요 할 때라며 단결을 호소하고 있다. 제2차는 ‘정치적 결사와 운동’으로 일본의 조선통치를 승인하는 조건하에 참정권,자치권을 얻자고 주장했으며, 제3차는‘산업적 결사와 운동’사람이 먹어야 산다며 산업진흥을 필설 했으며, 제4차‘교육적 결사와 운동’으로 구식교육을 탈피하고 피적포이술(避敵捕餌術) 즉 살아남기 위하여 어떻게 적을 피하고 먹이를 구하는 기술을 말하였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의 교육 방침은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할 가능성이 있는 내용을 일체 배격한 실용주의 방향을 천명하였다. 제5차의 사설내용으로는 ‘교육 산업 정치의 관계’로 최고 간부 지도하에 동시에 일으켜야 한다는 실용주의를 앞세운 동아일보는 그 결론을 맺고 있다. 이 사설이 발표되자 국내외에서 비난의 화살이 빗발치듯하니 동아일보측은 당황하여 1월29일자에 또다시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란 사설을 게재하여 자신들의 주장이 시류에 맞는 온당한 주장이라고 설득을 하려 들고 있다. 이 사설에 관하여 천도교 구파를 위시한 민족진영 인사들은 ‘우리는 무엇 때문에 3.1운동 이래 와신상담 하였는가?’라는 성명을 내고 일제식민지 치하에서는 어떠한 자치론도 일체 반대 한다고 천명하고 나섰으며, 조선노동총동맹을 비롯한 종교사회단체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조선노동총동맹은 그해 4월20일 동아일보를 성토하기 위한 임시총회를 열고서 동아일보 불매운동과 간부들을 매장하자는 강연회를 열자고 결의했다. 이뿐만 아니라 월간잡지 ‘개벽’동호인들도 동아일보의 매국 논설을 공박하고 동경유학생학우회 등 11개 단체들까지 연명으로 동아일보 성토문이 국내요로에 전달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동아일보에 고함’ 이라는 사설(1924.4.26일자 174호)로 성토했는데도 조선총독부는 무슨 이유인지 강 건너 불구경하듯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여기서 춘원 이광수와 동아일보와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광수는 고아출신으로 벽초 홍명희와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를 들어 일제치하의 3천재로 그는 신문학 초창기에 ‘무정(無情)’이란 소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당대 최고의 문사였다. 인촌이 동경유학시절 춘원의 학비를 조달한 적도 있는 인촌과는 각별한 인연으로 촉탁기자에서 동아일보 사장에 까지 오른 인물이다. 춘원은 동경유학생을 중심으로 2.8선언을 주도했으며 해외연락사명을 띠고서 상해로 탈출하여 상해임시정부조직에 가담하여 독립신문 주필이 되기도 했다.

항일독립투사로 동경과 상해에서 활동했던 애국지사 춘원은 1921.1월에 상해에 나타난 와세다 대학 후배 진학문(秦學文)의 회유와, 춘원은 본처를 두고 일본유학시절 열애를 했던 간호사 출신 혀영숙이 나타나 간절한 애소(哀訴)에 의해 1921.4.20일경 춘원 스스로 상해임시정부를 떠나 천진과 심양을 거쳐 밤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입국을 한다.

춘원은 그 당시 ‘나의고백’이란 전집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마침내 상해를 떠난 것은 신유년 이른 봄이었다. 나는 천진을 경유하여 봉천(심양)에 이르러,거시서 밤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선천 근방에서 이동경찰의 손에 붙들려 신의주로 끌려왔다. 나는 잡힐 것을 예기는 하였으나 될 수 있으면 서울까지는 가고 싶었었다. 신의주 경찰서에서는 박 누구라는 사범주임에게 잠간 내가 누군 것은 심문을 받고서는 유도실에 감금이 되었다.(중략)그는 야마구찌라고 쓰인 전보 한 장을 들고 앉아서 밤차로 서울로 가라고 하였다. 뒤에 알고 보니 야마구찌는 그 때 경무국 고등경찰 과장이었다.(중략)조선일보에서 내가 귀순하여 돌아왔다는 기사를 낸 것을 시초로 모든 신문과 잡지서에 독립운동을 배반한 자라 공격하였다. 김성수,송진우,장덕수,최남선,홍명희,김기전 같은 친구들은 그래도 나를 찾아 주었다.(이하생략)

상해 임시정부 대변인 겸 ‘독립신문’ 주필이었던 이광수는 귀순하여 아무처벌도 받음 없이 일제의 비호아래 1년간 안주하며 종학원(宗學院)강사시절 ‘개벽’에 4만 여자에 달하는 ‘민족개조론’ 논문을 발표하여 항일정신에 찬물을 끼얹는데, 1923년 5월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동아일보 촉탁기자로 입사하게 된다. 강동진씨의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에는 총독부의 주선으로 입사한 이광수는 거금 3백엥의 수당을 받기로 입사경위를 기술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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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6/14 [10:06]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