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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을 재조명하라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9/05 [17:11]

 

 

 

태평양 전쟁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일본 간의 태평양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20세기 초 유럽의 이탈리아, 독일과 아시아의 일본은 경제 공황을 이기기 위해 각각 파시즘, 나치즘, 제국주의 등을 주장하며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각자 전쟁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2차 세계 대전이다.

 

일본은 조선을 정복한 뒤 1935년 중국을 침략하여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국가원수-푸이)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일본의 계속되는 중국 침략으로 인하여 결국 중화민국(국가원수-장제스)은 미국의 의회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 달라는 로비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미 의회는 일본이 중국 전선에서 물러날 것과 삼국동맹(독일-일본-이탈리아)을 무효화하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미국이 내정에 간섭한다고 판단한다. 결국 일본은 도조 히데키 중장을 수상으로 하여 전쟁 준비를 하게 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중장을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임명하여 미국 공격을 준비한다. 그러면서 일본은 미국의 방해에 복수하기 위해 1941년 어느 날 새벽, 기습공격으로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한다. 나구모 쥬이치 중장을 중심으로 한 제1 항공모함 전대를 출동하여 하와이의 진주만항을 기습하여 구형전함 8척을 격침시킨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 후 바로 영국의 식민지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말레이 해전에서 순양전함 리펄스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격침시킨다. 인도양 해전에서는 영국 순양함 2척과 항공모함 허미스를 격침시켜서 영국의 동양 함대를 일단 몰아 내버린다.

 

일본 육군은 인도차이나와 다른 여러 국가를 침략했다. 일본의 승전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은 바로 항모 호넷을 중심으로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이다. 그러자 일본 해군은 미 항모를 격침시키기로 한다. 바로 산호해 해전이다.

 

미국은 요크타운이 대파되고 공모 렉싱턴이 격침된다. 일본은 쇼카쿠가 대파 되어 6개월간의 수리작업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즈이가쿠는 모든 에어그룹이 소진되어 항공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이 발생하여 일본 해군의 공모 4(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가 모두 격침된다.

 

과탈카날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한 미군은 조금씩 일본의 숨통을 조여온다. 레이테 해전으로 인하여 일본은 전투함의 전력마저 상실하였고 가미카제와 사쿠라바나 카이덴 같은 자폭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군 역시 일방적으로 와일드켓에게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오지마 상륙전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공략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미군이 드디어 일본의 본토에 역사적으로 처음 상륙한다.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군까지 일본을 공격했다. 결국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공격을 받는다.

 

두 차례의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다음의 원폭공격지는 도쿄라고 예상한 일본 국민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이에 89, 어전회의가 소집되었다. 쇼와 천황 및 군부의 대신들은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810일 일본은 무전으로 연합국에 항복 의사를 타전했다. 그리고 815, 쇼와 천황이 직접 라디오로 전쟁 종결을 선언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러나 지나 파견군과 남방군은 이에 항의하며 전쟁을 계속 하기로 결정했다.

 

우가키 마토메 같은 본토 결전주의자들은 분에 못 이겨 스스로 자결하거나 특공기를 타고 연합군 진지로 자살 공격하러 가기도 했다. 이날 스즈키 칸타로 내각은 전원이 사퇴하였다. 816일 소련이 카라후토(사할린) 남부를 침공하자 대본영은 정전협정을 발효했다.

 

817일에 스즈키 내각을 대신해 히가시 쿠니노미야 친왕이 수상이 된다. 이어 황족들의 대표가 연합국의 허가를 얻어 인도차이나, 싱가포르, 중국 방면으로 가서 각 군에게 항복 사실을 알렸다. 819, 필리핀의 잔존 일본군이 연합군에 항복했고 826일에는 만주 지역에서의 전투가 종결되었다.

 

830일에는 맥아더 대장이 일본에 도착한다. 92일 미주리 호 함상에서 일본 측 대표가 항복 문서에 조인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은 종결되었다. 1015일부로 일본 본토의 모든 일본군은 무장해제가 되었다. 일본은 맥아더를 사령관으로 하는 GHQ(연합국 군사위임통치기구)에 의한 위임 통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이 입은 인명 피해(사망자)는 총 42만여 명이다. 이중 유럽 전선에서의 피해가 30만 명에 육박하고 태평양 전선에서의 죽은 미군은 12만 여명이다. 포로로 잡힌 병력 중 일본군의 전쟁범죄 및 기아, 질병, 아군 폭격 등을 총합해 12,935명이 추가로 죽었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 이후 1942년까지 사상자가 60만여 명이다. 대부분은 중일전쟁에서 입은 것이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선 1942년 중반 이후부터 종전까지 3년 동안 태평양과 중국 전선을 합하여 240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일본의 본토에서도 19453월 이후 후방의 민간인들까지 엄청나게 죽어갔다. 가장 큰 인명 피해를 입은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1937년 개전 이래 무려 8년 동안 일본과 혈전을 펼쳤다. 일본의 무차별 폭격 등으로 최대 3,50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 중 90% 이상이 민간인이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의 가혹한 징발 정책에 의한 기아와 질병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3~4백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1~2백만, 필리핀에서 50~100, 영국령 버마에서 25, 포르투갈령 티모르에서 5~7, 영국령 인도에서 150~250만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령 싱가포르에서도 학살 및 기아로 5만 명이 죽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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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05 [17:11]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