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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호남정맥 천황지맥의 남원 왕묘산王墓山(322.9m)
왕지전면의 유래와 교룡산성을 쌓은 왕유후의 왕묘(王墓)를 간직한 산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9/09/19 [16:59]

 

▲ 내동마을서 본 왕묘산     © 새만금일보

 

왕묘산 남쪽 내척동 내동마을 위에 위치한 왕묘동은 신라 때 교룡산을 쌓고 남원에서 죽은 중국의 장수 왕유후를 왕으로 예우하여 장례한 왕묘王墓를 간직한 곳이다. 왕지전방王之田坊의 지명도 왕유후가 묻힌 왕묘를 보살피고 제사지낼 전답이 있었던 곳이란 의미다. 내동마을 위에 있었던 왕묘동에는 왕묘를 관리했던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왕재산은 내척동의 옛 지명인 왕치면王峙面(왕재)에서 따온 이름이다. 따라서 왕재산보다 왕지전면의 유래와 왕으로 예우하여 장례했던 왕유후의 왕묘王墓를 간직한 왕묘산으로 불러야 역사적 의미가 더 깊다.

<<한국 지명 총람>>에는 왕재산은 너랭이골 북쪽에 있는 산이다. 왕묘동王墓洞은 내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왕묘골 방죽은 왕묘골 남쪽을 이루는 연못이다.”고 나와 있다.

 

▲ 내척동서 본 왕묘산     © 새만금일보

 

<<조선환여승람>> (남원)에는 왕묘동王墓洞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왕묘동은 왕치면王峙面에 있다. 신라 때 중국 장수 왕유후王儒候와 설인귀薛仁貴가 교룡산에다 성을 쌓았는데, 설 장수는 일을 마치고 돌아갔다. 하지만 왕 장수는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에 그를 왕으로 장례하였으며 그를 제사지낼 전답까지 주었다. 이 방의 이름을 왕지전王之田이라하였다. 훗날 사람들이 그의 묘를 가르켜 왕묘王墓라 하였다.

<<남원의 마을유래>><<한국 지명 총람>>에는 내척동은 본래 왕지전면王之田面의 지역인데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리, 미척리, 구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동과 미척의 이름을 따서 내척리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역사적이나 풍수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서 임금 왕을 쓰는 산의 유래를 고찰해 보면 모두 왕이나 임금과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산청군 군서면에 있는 왕산王山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이 있다. 문경시 산양면의 왕의산王衣山은 고려 공민왕이 몽고군의 침입 때 안동으로 피난했다가 환궁 때 이 산의 나무에 옷을 걸어놓고 쉬었던 곳이다. 포천시 포천읍에 있는 왕방산王方山은 조선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뒤 귀경하다가 왕자들의 골육상쟁을 소식을 듣고 아픔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서 며칠을 머물렀다하여 왕방산으로 불렀다.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왕모산王母山은 홍건적 난 때 고려 공민왕의 어머니가 피난을 갔다.

군산대 곽장근 교수는 왕묘는 왕이나 임금이 묻힌 왕릉이 아닌 왕으로 예우 받았던 무덤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왕묘산 남봉(교룡산 분기점)     © 새만금일보

 

<<한국 지명 총람>>에는 왕재산은 너랭이골 북쪽에 있는 산으로 나와 있다. <<남원의 마을유래>> (내척동) 산림형태는 남쪽에 교룡산이 있고 북쪽에 너레이산(내동 뒷산 325.0m)이 있어 남북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내척천이 발원하여 광치천으로 합류한다고 나와 있다.

<<전북의 하천과 주변문화>>( 남원 내척천)에는 내척천은 남원시 북부 뒷밤재(370.0m)에서 너레이산(325.0m), 왕재봉(273.0m)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합치면서 시작된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왕재봉의 위치를 322.9봉이 아닌 뒷밤재 바로 옆에 있는 272.8m봉으로 잘못 기록하였다. <<남원의 마을유래>>에 나와 있는 너레이산(내동 뒷산)의 높이(325.0m) 도 잘못 표기되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에는 산의 높이(322.9m)만 표기되어 있다. <전라북도 전도>, <<한국 지명유래집>에는 왕묘산 기록이 없다.

 

▲ 왕묘산 남봉서 교룡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 새만금일보

 

1769년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우리 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로 고찰해 본 왕묘산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렇다.

백두대간 장수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분기된 금남호남정맥 팔공산에서 서쪽으로 갈려나온 산줄기가 마령치를 지나 백운산(갈미봉)에 닿는다. 백운산에서 북쪽은 성수지맥(성수산 줄기), 서쪽은 영대지맥(영대산 줄기), 남쪽은 천황지맥(천황산 줄기)으로 세 갈래를 친다.

백운산에서 천황지맥은 남쪽으로 뻗어가며 개동산, 상서산, 상서산 북봉. 중봉. 동봉, 만행산 천황봉, 약산, 갈치, 책여산, 어깨재, 호치, 나분들봉, 뒷밤재봉을 지나 왕묘산을 일으킨다.

왕묘산의 물줄기는 서쪽은 사매면 대율리에서 발원하는 월평천이 같은 면 서도리에서 오수천으로 유입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남쪽은 율치천이 용정동에서 광치천에 유입되어 주생면에서 요천을 만나 섬진강에 합수되어 남해로 흘러든다. 왕묘산의 행정구역은 남원시 내척동 내동마을과 사매면 화정리. 대율리의 경계를 이룬다.

 

지리적으로 왕묘산의 북쪽은 화정산, 북동쪽은 계룡산 너머로 만행산 천황봉이 수호신처럼 지켜준다. 동쪽은 뒷밤재봉과 청룡산, 동남쪽은 남원시가지가 있다. 남쪽은 교룡산과 기린봉, 남서쪽은 천황지맥의 풍악산과 매봉, 서쪽은 천황지맥의 노적봉줄기가 에워싸고 있다.

 

<<한국 지명 총람>>, <<남원의 마을 유래>> 등으로 살펴본 왕묘산 주변 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남원시 내척동은 본래 남원군 왕지전면의 지역인데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리, 미척리, 구룡리를 일부를 병합하여 내동과 내척의 이름을 따서 내척리라 하여 왕치면에 편입되었다. 1956년 남원읍, 1981년 남원시 내척동이 되었다.

내척동 내동마을은 1200년경(고려 선종) 권 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1480년경(조선 성종)진주 소 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번창하였다. 풍수지리상 여인이 베틀에 앉아 잣대로 배를 재고 있는 형국이라서 마을이름을 안내 내와 자 척을 쓰는 내척이 되었다.

 

<문화유적과 명소>

[내척동 석불입상]

미동마을 뒤 교룡산성으로 가는 길가에 위치한 내척동 석불입상은 조선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광배의 크기는 높이가 178cm, 폭은 142cm, 부처는 높이 150cm, 어깨 폭 60cm. 손과 발은 별석으로 만들어 끼우도록 되어 있으며 결실되었다. 광배는 자연 판석으로 주형을 이루며 자연석으로 된 대좌는 중앙에 홈을 파서 불상을 받치고 있을 뿐이다.

 

▲ 왕묘산 정상,필자와 답사팀     © 새만금일보

 

<산행안내>

o 1코스 : 뒷밤재(뒷밤재 솔바람길)-춘향정-왕묘산-왕묘산 남봉(동쪽, 교룡분맥 분기점)-교룡산 갈림길-내척동 내동마을(4.5km, 2시간 소요)

o 광치동 호치마을-호치-석산채굴지-천황지맥 능선-호치봉 삼거리(남쪽)-호치봉-호치봉삼거리-나분들재-나분들봉-뒷밤재봉-뒷밤재(3.5km, 2시간)-춘향각-뒷밤재 솔바람길-서남대갈림길-왕묘산-왕묘산 남봉(교룡분맥 분기점)-내척동 내동마을회관(8.2km, 4시간 20분 소요)

 

▲ 내척동서 본 왕묘산 남봉     © 새만금일보

 

<교통안내>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고죽동-호치마을-호치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17번 국도- 뒷밤재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내척동 내동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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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9/19 [16:59]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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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 김정길, 수필가, 숲 해설가, 전통지리연구가 주요약력-전북산악연맹 부회장/숲사랑운동 서부연합단체 대표/모악산지킴이 회장/영호남수필문학협회 전북회장/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 부회장
국민연금공단 국정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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