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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정기 서린 남원 수실봉繡室峰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20/01/09 [14:43]

 

▲ 효촌 서 본 수실봉     © 새만금일보


 <개요와 자연경관>
  효부마을로 알려진 효기리 효촌孝村의 주산인 수실봉은 효심 높은 효부가 섬섬옥수 수를 놓은 아름다운 연꽃모습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궁중에서 수를 놓는 궁수宮繡, 불가에서 수를 놓는 불수佛繡, 민가의 수로 나뉘었다. 삼국시대에는 자수가 성행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복식품으로서 왕과 왕비의 의복과 보, 흉배, 병풍, 생활소품 등에 사용되었다.
  최형우 전 이백면장과 최성태 이백산악회장, 최석범 전 전북도청 산림녹지과장 등의 고증에 의하면 수실봉繡室峰은 효촌마을 동남쪽 솟아 있는 연꽃모습이라고 한다. <<한국지명총람>>에 “수실봉은 솔치(효촌) 동쪽에 있는 산”으로 나와 있다. <<두산백과>>에는 “연화사蓮華寺는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 외련산外蓮山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사찰로 신라 말 도선이 창건하였다.”고 나와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연화사의 동쪽에 위치한 수실봉은 내련산內蓮山, 연화사 북쪽에 있는 연산은 외련산外蓮山으로 불린 성 싶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에는 연화사와 수실봉의 높이만 나와 있다. <전라북도 전도>와 <남원시 행정지도>에는 수실봉에 대한 표기가 없다.

 

▲ 효촌서 본 수실봉.매봉     © 새만금일보

 

  <산경山經과 수경水經>
   1769년경 여암 신경준이 편찬한 우리 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로 고찰해 본 수실봉의 산줄기와 물줄기는 이렇다.
  백두대간의 남원 땅의 시작점과 연비지맥이 분기되는 삼계봉(남원시, 장수군, 경남 함양군)에서 동쪽으로 연비지맥(38km)을 나뉜다. 삼계봉에서 백두대간은 봉화산, 투구봉, 매봉, 아막성산, 청계산, 시리봉, 산불산, 무덤산, 고남산을 지나 수정봉에 닿는다. 수정봉에서 서쪽으로 나뉜 산줄기에 수실봉(내련산)을 일으킨다. 수실봉의 물줄기는 효촌천을 통하여 요천에 합류해서 섬진강으로 향한다. 수실봉의 행정구역은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 효촌이다.
 

▲ 효촌 솔차샘     © 새만금일보


<지리적 위치>
 지리적으로 수실봉의 북쪽과 동쪽은 백두대간의 주지봉과 수정봉, 동남쪽은 덕음봉, 남쪽은 구룡봉이 에워싸고 있다. 서쪽은 장백산과 요천 너머로 남원시가지, 서북쪽은 말봉 등이 다가온다. 동쪽은 장백산 너머로 백두대간의 덕운봉 줄기가 용틀임한다.
  

▲ 효촌마을과 매봉     © 새만금일보


 <주변문화와 인문지리>
  <<용성지>>, <<남원의 마을유래>>, <<한국 지명 총람>>, <<두산백과>> 등으로 살펴본 수실봉 주변문화와 인문지리는 이렇다.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는 본래 남원군 백암면 지역이다. 1914년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기리, 효촌리와 백파면의 상구리, 신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효촌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효기리라 하였다. 1995년 남원시·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이백면 효기리가 되었다.

 

▲ 효촌과 수실봉     © 새만금일보



  효기孝基마을은 옛날 부족국가 시대 마한의 대방국에 속했다. 지금의 마을 동쪽에 조정지라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살아오다가 대방국이 망하면서 마을이 폐허되어 약 1km 떨어진 곳에 신기마을을 형성하여 라 씨와 홍 씨가 누대에 걸쳐 살아 왔다.
  300년 전에 최항의 9대 손인 최시옹이 이주하면서 이백면에서 가장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1961년 7월 수해로 인하여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 新基마을을 형성하여 여러 성씨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역전제를 실시할 때 구례에서 운봉으로 향하는 응령역應嶺驛이 있었다. 그리고 마을 뒷산에 매봉(鷹峰)이 있어 응령鷹嶺이라 칭하여 응령역鷹嶺驛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디지털남원문화대전>>에는 은령역銀嶺驛인데 응령역應嶺驛으로 부른다고 나와 있다.  

 

▲ 2효촌서 본 매봉     © 새만금일보

 

<문화유적과 명소>
[용성지 서문을 쓴 남원의 대학자 최시옹]
 <<용성지>>는 <<춘향전>>과 함께 남원 인이 낳은 불후의 명작이다. <<용성지>>는 17세기말의 남원지방의 향촌사회의 실정을 생생하고 풍부하게 전해주는 종합적인 귀중한 자료다. 서문을 쓴 최시옹은 조선 후기 남원의 대학자로 이백면 효촌 사람이다. <<용성지>>는 1699년(숙종 25년) 이도, 최여권 등이 편찬한 것을 1752년(영조 28)에 보유를 붙여 간행한 전라도 남원읍지다. 그는 서문에서 “용성읍이 있게 된 이래 1600년 동안 남원의 역사와 문물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고 정유재란 등으로 기록물들이 손실되어 남원부만 읍지를 가지지 못했다.”고 밝혔다.

 

▲ 효기서 본 매봉     © 새만금일보


  최시옹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한신, 호는 동강, 영의정 영성부원군 최항崔恒의 9대손이고, 익위翊衛 최휘지崔徽之의 아들이다. 그는 19세에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이나 지위에 뜻을 두지 않았다. 영조가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여러 차례 불렀을 때도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예학에 밝아 전라도 남원부의 풍속 정화를 위해 보인당이라는 서당에서 선유예법에 따라 사례四禮를 강론하였다. 남원부의 사풍士風과 민속의 독실함에 영향을 끼쳤다. 저술은 <<동강유고東岡遺稿>> 8권 2책과 <<동강가의東岡家儀>> 2권 1책이 전한다. 묘소는 전남 구례군 구례읍 월암리에 있다.

 

▲ 효촌서 본 장백산     © 새만금일보


[효부마을]
 남원의 대학자인 최시옹은 회갑이 지나서 낳은 아들이 경기 여주골 파평 윤 씨 며느리를 맞이했다. 그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에서는 효부상을 내렸다. 이 마을에 효부가 났다하여 효촌孝村으로 불렀다.


[효촌마을 솔치샘]
 효촌마을의 큰 오석 비석에는 “좌청룡 우백호가 힘차고 뚜렷한 천하명당 매화낙지에 부모봉양 잘하고 오손도손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다 가신 앞사람 들을 잊지 말자.”는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옛 흔적이 서린 우물에는 지붕까지 쓰워져 있고 오석비도 서있다.


 [응령역應嶺驛]
  이백면 효기리에 있었던 응령역은 조선시대 역전제를 실시할 때 오수도찰방 관할 12개 역중의 하나다. 그런데 응령역의 명칭과 한자명이 제각각이라서 명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와 <<용성지>>에는 “응령역應嶺驛은 부의 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기리에 세워진 <응령역 표석>에도 한자명이 응령역應嶺驛으로 표기되었다. 반면<<디지털남원문화대전>>에는 은령역銀嶺驛 또는 응령역應嶺驛으로 나와 있다. <<남원의 마을유래>>에는 응할 응應을 쓰는 응령역應嶺驛과 효천 뒷산에 매봉(鷹峯)이 있어 매 응鷹을 쓰는 응령역鷹嶺驛으로 나와 있다.

 

▲ 입촌 위서 본 연산과 연화사     © 새만금일보

 

<산행안내>
 o 효기리 효촌-연화사-입촌 제2저수지(동쪽)-수실봉-연화사-효촌마을


<교통안내>
 o 광주대구고속도로 남원나들목-고죽교차로-척문리-이백면-효기리 효촌 
 o 남원-고죽교차로(19번 국도)-척문리(15번 도로)-이백면-효기리 효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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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1/09 [14:43]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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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 김정길, 수필가, 숲 해설가, 전통지리연구가 주요약력-전북산악연맹 부회장/숲사랑운동 서부연합단체 대표/모악산지킴이 회장/영호남수필문학협회 전북회장/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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