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노래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3/13 [05:01]

전라도 노래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3/13 [05:01]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일컬어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해 음식문화가 발달되었다. 민심이 순후하여 과객을 융숭히 대접함은 물론, 숙식을 제공하는 사랑방 인심이 좋았다. 그래서 조선8도 중에 전라도 인심을 제일로 꼽았다. 중국 호남성 이름을 딴 호남가(湖南歌)는 단가로 조선후기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이서구(書九 1754-1825)가 지었다는 데 구전으로 전할 뿐이다. 호남가는 54개 고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 전라도 노래로 풍류 기행의 멋스런 가사이다. 그 첫머리 지명이 함평이며 마지막이 남평인데 남평은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제작한 나대용(大用) 장군의 고향이다. 특히 익산시 함라(咸羅)는 비단의 고장이며, 함열(咸悅)은 기뻐한다는 뜻이다. 이곳은 비옥한 문전옥답과 넓은 들에서 쌀이 많이 나는 부촌이다. 함열은 전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과객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전라 좌도에서 올라오는 과객들은 순천과 구례, 남원을 거쳐 전주를 지나 삼례()에 모인다. 전라 좌도의 유명한 남원의 박연당(17531830)이 지었다는 몽심재(夢心齋)는 큰 사랑채를 지어 많은 과객들의 숙식을 제공한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한 집안이었다. 전라 우도 길인 해남·목포·나주·정읍을 거쳐 한양에 가는 과객들이 삼례에 모인다. 전라 우도에서 인심 좋았던 집은 김제 금구(金溝)의 서도 장씨(西道 張氏)집안이다. 보름이면 소 한 마리씩을 잡아서 과객에게 대접했다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어학회에 자금을 댔던 장현식 선생이 서도 장씨다. 전라 좌·우도의 길손들이 서울로 올라갈 때 삼례를 지나 첫 번째 집결지가 바로 함열이다. 함열에는 만석꾼이 3집으로 조(), (), ()씨 집안이 모두 거부였다. 조 부자 집에서 굴비정식을 반찬으로 올리면, 김 부자 집에서는 쇠고깃국을 밥상에 올리는 등 세 집은 경쟁이나 하듯 손님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의식 있는 조선시대 부자들은 나그네에게 후하게 대접해서 ‘덕망 있는 집’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았다. ‘인심은 함열’이라는 이름도 이 시기에 나온 것 같다. 세 집안 중 김 부자 집 김해균(海均)이라는 인물은 남로당의 거두 박헌영과 경기고 동문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경대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해방 후 박헌영에게 자금을 대준 김해균의 서울 집이 바로 혜화동에 있는 혜화장(惠化莊)에서 박헌영이 유숙했다. 지금도 함라에 가면 전라도에서는 가장 큰 한옥체험의 고택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그러면 여기서 호남가를 함께 음미하며 불러보도록 하겠다.

<함평(咸平)천지 늙은 몸이 광주(光州)고향을 보랴 허고, 제주(濟州)어선을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갈 때 흥양(興陽)에 돋은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에 아침안개 영암()에 둘러있다. 태인(泰仁)하신 우리성군 예악을 장흥(長興)하니 삼태육경은 순천(順天)심이요. 방백수령은 진안(鎭安)민이라. 고창(高敞)성 높이 앉아 나주()풍경을 바라보니 만장운봉(雲峰)은 층층한 익산(益山)이요, 백리 담양(潭陽)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만경(萬頃)이라 용담())에 맑은 물은 이 아니 용안()()인가. 능주(能州)의 붉은 꽃은 가지가지 금산(金山)이요 남원(南原)에 봄이 들어 각색화초(各色花草) 무장(茂長)허니, 나무나무 임실(任實)이요, 가지가지 옥과(玉果)로다. 풍속은 화순(和順)이요, 인심은 함열(咸悅)인데, 이초(異草)는 무주(茂朱)허고 서기(瑞氣)는 영광()이라.

창평(昌平)한 좋은 세상 무안(務安)을 일삼으니 사농공상 낙안()이요 부자형제 동복(同腹)이라 강진(康津)에 고고선(高高船)은 진도(珍島)로 건너갈 때 금구(金溝)에 금()을 일어 쌓아 놓으니 김제()로다. 농사하는 옥구(沃溝)백성 임피성(陂城)을 둘러있다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자. 정읍(井邑)에 천백법은 납세인심 순창(淳昌)하고 고부(皐阜)청춘 양류색(楊柳色)은 광양(光陽)춘풍 새로워라.  곡성(谷城)에 묻힌 선배 구례(求禮)도 하거니와 흥덕(興德) 하길 힘을 쓰니 부안(扶安) 국가(國家) 이 아닌가. 우리호남의 구든 법이 전주(全州)백성 건지려고 장성(長成)을 널리 쌓고, 장수(長水)로 둘렸는데 여산석(山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아놓으니 어떠한 방외지국(方外之國)이 경거(輕擧)하게 뜻을 두랴.>

남도 함평은 호남가의 첫 대목의 지명이다. 중머리장단에 맞춰 여러 고을을 떠돌다 보면 누구나 집 떠난 나그네가 된다. 늙은 유랑객이 광주(光州) 고향을 보려고 제주(濟州) 어선을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 갈제, 흥양(興陽)의 돋는 해가 보성(寶城에 비쳐 있더라. 북도의 고산(高山)의 아침 안개는 어느새 남도 영암(靈巖)에 둘러 있다. 조선후기만 해도 제주와 금산은 호남에 속한 전라관찰사의 관할이었다. 태인(泰仁)허신 우리 성군 예악을 장흥(長興)하니, 크고 인자하신 성군(聖君)이 예악(禮樂)을 길이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지명과 그 의미가 절묘한 조합이다. 南原을 남쪽의 동산을 뜻하는 南園으로 바꿔 부르고, 본래 지명이 任實을 林로 슬쩍 바꿔 불렀다.  전라도 지역의 크고 작음에 구애받지 않고 고산, 임피, 창평 등 일반인에게 낯선 작은 고을은 앞세웠는데, 이 또한 호남가 만의 묘미가 아닐까. 고창성(高敞城)에 높이 앉어 나주(羅州)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노령산맥의 경계 분기점을 노래하였다. 남도 함평에서 시작한 호남가는 북도 임피까지 오가는 인생의 역정을 몸소 체험해보며 풍악을 즐기는 우리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낸 전라도 가락의 파노라마 같은 대 서사시라고 칭송해도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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