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갈재와 백양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5/22 [09:27]

장성갈재와 백양산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5/22 [09:27]

 

 

전라남,북도의 경계인 장성갈재를 넘어 백양역에서 백양사로 가는 길에 봄이면 산등성이마다 누가 심지도 않은 산 벚꽃이 눈꽃 송이처럼 만발하여 장관이다. 바다같이 드넓은 장성호의 잔잔한 호수는 들뜬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32년 서기632년 여환대사(如幻大師)가 창건했다는데 백양사 극략교를 건너 백양산으로 가는 숲길은 몇 아름드리 괴목과 하늘을 뒤덮은 비자나무 군락이 터널을 이뤄 한 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석양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깎아지른 듯 한 험악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돌계단을 따라 가다보면 오르막 계단이 어찌나 가파른지 금 새 등줄기는 땀으로 흠뻑 젖는다. 천야만야한 암벽을 휘감아 돌계단을 따라 오르니 검은 독수리가 천길 바위틈에 보금자리를 틀어 알을 품듯 약사암(藥師庵)이라는 암자가 암벽에 매달려 있다. 약사암을 지나 바위계단을 내려가다가 또다시 오르니 우편으로 무설당(無說堂)이라는 암자가 또 하나 암벽 난간위에 찰싹 붙어 있다. 무설당? 설법이나 설문이 필요 없으니 스스로 깨닫기 바란다는 뜻인가. 아이 볼기짝만한 좁은 마당에 작은 석불이 실눈을 감고서 좌정하였는데 장난 끼 많은 동자스님이 작은 바구니 속 동전 한 닢을 몰래 꺼내 가는 데 그 석불은  바구니를 꼬-옥 껴안은 채 춘곤증에 졸고 있어 웃음이 절로 난다. 또다시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여러 개의 촛불이 밝혀져 방처럼 아늑한 대 여섯 평 되는 동굴 안에서 60대 초반의 병색이 가득한 여인네가 정성스럽게 돌부처에게 치성을 드리고 있다. 바윗돌에 새겨진 영천약수 석간수를 한바가지 떠서 마시니 등줄기를 적신 땀이 가시며 뱃속까지 시려와 약효가 발동했는지 몽롱했던 두 눈이 금 새 밝아온다. 그래서 아마도 암자 이름을 약사암 이라 부르는가 보다. 약사암 서편 구석진 작은 건물에 해우소(解憂所)라는 간판이 격에 어울리지 않게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세상번뇌 근심, 걱정 다 잊고 문제를 풀고 가라는 뜻인가 보다. 이곳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타고 또다시 20여분을 힘겹게 오르면 백학봉 중봉에 이르는데, 눈 아래 골 깊은 골짜기 좌, 우 천변에 신록이 우거져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마치 사바세계를 떠나 말만 듣던 도솔천의 신선이 된 기분이다. 백학봉을 뒤로 하고 내리막길 세 갈래 갈림길에서 좌편으로 내려서니 잘 다듬어진 둥실한 봉분 하나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묘비명을 보니 인촌 김성수의 본처 고씨 부인의 묘다. 하얀 학이 좌우 날개로 감싸 안은 듯 한 경치 좋은 백학산 중턱에 고씨는 홀로 누어있다. 이 같은 험하고 깊은 산속에 묘를 조성하다니... 인생은 한번 왔다가 한줌의 흙으로 갈뿐인데 호화로운 묘비명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려는 후손들의 체면과 도리일까. 인촌의 조부 김요협(1832-1909)은 이곳 장성 땅 대맥동에서 살았는데, 울산이 본이며 그의 중시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1510-1560)를 이퇴계와 쌍벽을 이룬 대학자로 자랑삼는다. 그의 선조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 왕자 학성부원군 김덕지(德摯)의 후예로 김인후의 5대조인 개국원종공신 김온()의 부인 여흥 민씨가 태종 이방원의 왕권강화로 민무구 형제가 화를 입자 3형제를 이끌고 이곳 장성 깊은 골에 숨어살게 된 동기다. 기골이 장대한 백면서생 김요협은 1850년경 장성 갈재를 넘어 고창의 정계량이란 부자집 식객으로 들어간다. 정부자집 일을 돌보며 사랑에서 기거를 하였는데 딸만 있는 정부자의 눈에 들어 데릴사위로 삼아 논 두 섬지기(8,000)를 주어 한마을에 살게 한다. 밤을 낮 삼아 일하여 매년 농토를 사서 재산을 모았는데, 정부자가 늙자 사실상 아들노릇을 하여 마지막에는 정 부자의 재산 전체를 물려받는 횡재를 한다. 처족 일가들은 김요업의 권세에 눌려 살지 못하고 남도 어디론가 떠나갔다고 한다. 김성수의 조부 김요업은 슬하에 두 아들  기중, 경중을 두었는데 장자 기중은 아들이 없어 경중의 두 아들 (성수, 연수) 중 큰아들 성수를 양자로 삼는다.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받은 김성수(1891-1955)는 기업가로 성공하여 고려대를 창설하고 담양의 올곧은 선비의 아들 송진우와  친구 백관수, 장덕수, 이광수, 김철수 등에게 일본 유학비를 대주어 그들로 하여금 해방 후 도움을 받아 부통령까지 되는 명문거족이 된다. 한말 거부들의 재산평가에 대한 1911년 시사일보 보도에 의하면 당시 부자로  50만원(황소 1마리 값이 50) 이상 소유자 32명 중, 10대 큰 부자로는 민영휘, 송병준, 박영효, 김진섭, *김경중(김성수의 부), 최현식, 장길상, 이윤용, 민병석, 정재학 등 열 손가락 안에 꼽힌 거부 축에 들었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인촌의 생부 경중은 쌀 400석을 실을 수 있는 중선 배 줄포환(茁浦丸)2척으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쌀과 인삼, 한약재를 사 이문을 남기는 무역을 하며 중국 산동성을 출발하여 위도에 정박했다가 해가 지면 미개구안(未開口岸) 고창 상포나루에 배를 대 짐을 하역할 때 근동에 어린애 까지 동원하여 횃불을 들게 하여 동전 몇 닢씩 주었으며, 관원의 눈을 피하기에 좋은 여건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대규모 비행기 공장을 추진한 김연수는 전쟁이 종식되는 바람에 다행히도 전범자를 면했다. 가장 부패한 전두환 정권 때 김연수의 아들 김상협은 국무총리로써 김씨 일문을 보호하고 지금까지도 떵떵거리며 몇 대를 잘살고 있으니 아무튼 항간에 말하는 명당자리나 썼다는 집안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산수 좋은 백양산 백학봉(白鶴峯)고씨 묘는 인촌 조부의 고향땅을 상기하며 그의 후손들이 묘를 조성했지 않았나 생각된다. 고목이 빽빽이 들어선 백양산 골짜기는 맑은 물이 철철 넘쳐흐른다. 화창한 봄날 백양산에는 어느새 저녁 산그늘이 찾아든다. 서산으로 기우는 해가 잔잔한 장성 호숫가 수평선 위에 수많은 은빛 은어 떼들이 몰려왔다가 몰려가며 은물결 금물결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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