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의 친일 시비(是非)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20/09/18 [09:58]

인촌의 친일 시비(是非)

새만금일보 | 입력 : 2020/09/18 [09:58]

 

 

평생을 후학을 위해 몸 바쳐 온 교육자 L이라는 분의 굴절된 양심에 실망이 컸다. 내용인즉 인촌 김성수(1891-1955)는 민족의 스승이요, 애국자로써 고려대학을 설립한 교육가요, 사업가로 조국 발전에 큰 공을 세운 분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하였다. 알고 보니 정년 후 늦깎이로 고려대학교를 들락거렸다는 이유로 인촌의 친일에 반기를 들었다. 인촌의 선대와 인촌 형제의 삶을 재조명해 보련다. 인촌은 신라 56대 경순왕의 둘째왕자 학성부원군 김덕지(金德摯)의 후예다. 중시조는 조선개국원종공신 김온(金穩)으로 태종 이방원의 왕권강화로 왕비 여흥민씨 민무구 형제가 옥사로 인하여, 김온의 부인 여흥민씨는 아들 3형제와 함께 전남 장성 대맥동에 숨어 뿌리를 내리게 된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명종 때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기념한 장성 필암서원이 대원군 때 헐리지 않고 건재해 있다. 인촌의 조부 김요협(金堯夾)(1832-1909)은 백면서생으로 1850년 경 고창 갑부 정계량(鄭季良)집 사랑에 들어 식객노릇을 하였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행동거지가 남달라 딸만 있던 정부자의 눈에 들어 데릴사위가 된다. 정부자가 늙어 사실상 아들노릇을 하여 그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 일약 거부가 된다. 인촌의 조부는 두 아들 기중(琪中)과 경중(暻中)을 두었는데, 기중은 아들이 없어 장자세습에 의해 경중의 큰아들 김성수를 양자로 삼는다. 화적떼로 인해 고창 인촌리에서 줄포항으로 1907년에 이사를 왔는데, 인촌의 나이 17세 때였다. 인촌의 생부 김경중은 이재(理財)에 밝아 400석을 실을 수 있는 줄포환(茁浦丸) 중선 2척으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큰돈을 벌었다. 1911년 당시 시사일보(時事日報)에 조선의 10대 갑부들을 나열했는데, 민영휘,송병준,박영효,김진섭,*김경중(金暻中),최현식,장길상,이윤용,민병석,정재학 등을 꼽았다. 인촌은 변산의 명 사찰 내소사 청련암에서 명종 때의 대학자 담양군의 면앙 송순(宋純1493-1583)의 후예 고하 송진우와 고창 흥덕 출신의 근촌 백관수(독립운동가 백정기 의사의 집안) 3인이 공부를 하게 된다. 평생지우 송진우의 일본유학을 제안 받아 고하와 인촌은 일본 유학길을 떠난다. 1914년 일본유학을 마친 인촌은 다음 해 쌀 3000석으로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학생80명을 300명으로 불려 일약 청년교육가로 자리를 잡는다. 19193.1운동 시 인촌은 부안 줄포 집으로 내려가 가담치 않아 인촌 일가는 무사하였다.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광목공장을 설립하는 등 실업가로써 명성을 날린다. 인촌의 아우 김연수 역시 일본 유학을 마친 후 만주 땅에 큰 규모의 집단농장을 설립하였는데 일본 놈의 학정에 못살게 된 조선의 동포, 주로 전라도민 등 100만 여명이 남부여대(男負女戴)김연수가 경영하는 만주농장으로 이주해 갔다. 만주 영구지방의 천일농장(27천석 수확)과 길림성의 반석농장,매하,교하, 구대, 다붕농장등 척식경영방식을 통해 엄청난 수확을 거둬들여 목단강에 위치한 관동군 기지창의 군량미 조달을 하게 된다. 또한 만주 봉천에 17만평에 달하는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설립 하여 방적기만도 1000대를 놓아 관동군 북지파견군 피복을 담당하게 된다. 위와 같은 큰 사업을 벌여 조선의 제일가는 자산 4,200만 엥이란 재산가로 전투기 헌납과 북방헌금으로 일제에게 충성을 하였다. 세계2차 대전 태평양전쟁 말기에 김연수는 해동은행을 인수하고 친일파의 거두 박흥식과 공동출자하여 대동직물을 설립하였으며, 10여명의 친일파들과 자본금 5000만앵을 조성하여 그 거금으로 미국과 대항 할 조선비행기공업을 설립하게 된다. 다행히도 비행기 제조 전에 종전이 되어 전범재판을 면하게 된다. 그러나 인촌형제는 조선반도 전국의 도,,,리에 이르기 까지 당시 2300만 전 국민을 묶어놓고서 학교,종교단체,유림,청년,부녀회,농민단체를 총 관리를 하는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 이사로 신사참배와 일본어상용과 징병,학병,근로보국대,여자정신대를 독려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인촌의 결정적인 친일행각은 194385,116일 매일신보에 학도(學徒)여 성전(聖戰)에 나서라. 대의(大義)에 죽을 때 황민(皇民)됨의 책무(責務)는 크도다.’라며 라디오방송과 강원도 춘천까지 순회연설을 했다. ‘친일은 어쩔 수 없었다며 반성은 커녕 항변으로 그 당시 변절의 인사들로는 최린,이성근,한규복,이규원,임숙재,이광수,최남선 등 서정주는 가미가제 미쓰이 희데오찬양시를 천황께 바쳤다. 인촌의 친일이 밝혀지자 고려대 학생들에 의해 후원에 있던 인촌의 동상을 끌어내렸고, 인촌의 묘는 고창선운산으로 이장을 하였다. 인촌은 친일로 인하여 그의 공은 무너져 2018년 대법원확정판결로 건국훈장 서훈 취소와 함께 친일인명부에 등재 되었다. 군국주의가 되살아나고 있는 일본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역사 왜곡, 초등교육을 시키는 이즈음! 한국의 교육자들은 행여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때이다.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바로알지 못하면 그 역사는 또 다시 반복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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