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납자규(諫納子規)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5/05/06 [06:53]

간납자규(諫納子規)

새만금일보 | 입력 : 2015/05/06 [06:53]




‘간납자규(諫納子規)’는‘간납대에서 들려오는 두견이 울음소리’를 말한다. 간납대(諫納臺)는 전주시 남노송동 일대의 적취정(積翠亭) 골짜기를 가리킨다. 전 영생고등학교에서 국군묘지에 이르는 곳을 말하며 속칭 낙수정골로 많이 불린다. 자규(子規)는 두견과의 새이며 두견이(杜鵑-) 혹은 귀촉도, 불여귀라고 부른다.

간납대(諫納臺)란 전주팔현(全州八賢)으로 알려진 운암형제(雲岩兄弟)의 충절(忠節)을 낳았던 데서 비롯됐다. 기린산동 계곡을 타고 내리는 석간수는 성황사를 돌아 바위길로 흘러 대숲을 핥고 관선천(觀善川)이 된다.

휘영청 가는 달, 대숲에 걸려 살랑거리는 바람에 대잎마다 달이 뜬다. 이승에서 못다 푼 맺힌 한, 두견새 되어 대숲 끼고 옮겨 날으며 우짖는다. 밤도야 울고 낮도 달밤인냥 또 운다.

이것 간납대 동천(洞天)은 칙칙한 대밭 고장이다. 그런데서 하늘을 차일(遮日)쳐 한낮도 어둠침침하고 날이라도 궂으면 호롱불이 아쉬운 곳이다. 그렇듯 심한 수압에 견딜 수 없는 바다 속같이 솟아 나대는 대숲 바람에 삼복더위의 피접 골로도 알려져 있다. 대숲 벗어나 기린정상을 바라고 오르면 청정난약(淸淨蘭若) 관선암 성황사 도량이요, 호국의 영령들이 고이 잠든 역내(域內)로 나선다.

간납대(諫納臺)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조선 인조 병자호란 이후다. 당시 전주에는 한산이씨(韓山李氏) 가문에서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渤), 서귀(西歸) 이기발(李起渤,1602-1662), 이생발(李生渤) 등 삼형제가 인재로 꼽혔다. 이들 3형제는 사마시에 동방(同榜)으로 급제를 했다. 모두 문과에도 급제를 하였는데 특히 이기발과 이생발은 동방으로 급제를 하여 당시 전주에서 인재로 소문이 났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기발은 형인 이흥발과 함께 의병을 모아 청주에 진주하여 남하하는 호병(胡兵) 아홉 명의 목을 베었다. 이어 남한산성을 사십리 거리에서 바라보며 달려가던 중 강화(降和)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 한 끝에 의병을 해산했다. 이흥발은 정묘호란 이전 해인 조선 인조 4년(1626)에 상소를 올려 청나라 사신을 목 벨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패하자 관직을 버렸다.

이듬해 벼슬을 그만둔 이기발은 고향인 전주에 돌아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높은 돈대(조금 높직한 평지)로 올라 북쪽을 향해 요배(搖拜)를 했다. 이기발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적취정(績翠亭) 골짜기 에서 방황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애국충정으로 제자들을 길러내어 우울한 일생을 보냈다.

간납대(諫納臺)는 바로 이기발이 기거한 곳이다. 그는 일찍이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지냈다. 그래서 사간원의 간(諫)자와 납(納)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 바로 간납대(諫納臺)이다. 이기발은 이곳 산중턱에 올라 당시의 어지러운 세상을 개탄했다. 그리고 때로는 한운야학(閑雲野鶴)과 같이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여생을 보냈다.

흔히 군경터로 알려진 이 동네는 낙수정이라고도 불린다. 낙수정 터는 낙수정 마을에서 보석사로 들어가는 길목 산언저리에 있었다. 낙수정 마을 앞 쪽으로는 해방 무렵에 피난민들이 정착한 농원마을이 있었다. 이곳 또한 여느 농원마을과 마찬가지로 당시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남노송동은 기린봉 자락이 기린로를 향해 뻗어 내린 간납대를 남쪽 경계로, 교동, 풍남동과 나뉜다. 기린봉 아파트 뒤편에서 전주상고를 거쳐 풍남초등학교까지를 북쪽 경계로 하여 중노송동과 경계를 이룬다. 조선시대 무렵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간납대 아래 즉 구 전주공업전문대학과 북서쪽 산비탈을 따라 몇 가호가 있었다.

기린봉 아래 참나무정이라는 자연부락만 있었다. 참나무정이는 말 그대로 예전에 이곳에 참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곳에는 한뎃시암이 있었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이 매우 좋아서 모든 사람들이 이 물을 사용했다. 이곳에는 미곡상이 있어 쌀과 콩나물을 팔기도 했다.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과 서들이꾼, 뒷대모도들이 주로 살았다.

이후에 참나무정이 남쪽 기린봉 아래에 농원마을이 생겼다. 이곳은 해방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교포들과 동란 이후 피난민들이 정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간납대 아래의 노송동 마을 앞은 미나리깡과 논밭이 전부였다. 참나무정이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있었다.

한편 전주 한산이씨 가문에는 무인세족이 있었다. 이들은 속칭 병사터라고 한 경기전의 동쪽 길 건너 현 중앙초등학교 자리에 모여 살았다. 병자호란 때 이운암 형제는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까지 진군하여 혈전을 벌이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 기거한 곳이 바로 기린봉 아래에 있는 적취정 골짜기이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3동 산64-3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한산이씨 운암공 흥발 종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충신 이흥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영조 29년(1753)에 나라에서‘충신이흥발지려’라는 정려각을 세웠다. 전주시 문화재자료 제168호로 지난 2000년 11월 17일 지정된 이 건물은 원형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한 칸의 홑처마 팔작집을 구성했다. 정려각 위에는 이흥발의 묘소가 있고 아래에는 종중 재실이 있다. 특히 이 정려각은 현존하는 정려의 대부분이 효자와 열녀에 관한 것인데 비해 충신의 정려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전형적인 정려각 건축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한편 이흥발 형제들은 한산이씨(韓山李氏)의 거목인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이흥발(1600-1673)의 집 앞 산의 추천(楸川) 위에 3개의 큰 바위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 최씨가 꿈에 첫 번 째의 바위를 머리에 얹고 돌다 이흥발을 낳았다 하여 어려서 그의 자를 재암(載巖)이라 했다.

또 꿈에 두 번 째의 바위를 등에 메고 돌다 이기발을 낳아 이기발의 자를 부암(負巖)이라 하고, 또 꿈에 세 번 째의 바위를 안고 돌다 이생발을 낳아 이생발의 자를 포암(抱巖)이라 하였다 한다. 3형제가 모두 재능이 출중하고 용모가 뛰어났으며, 뜻이 크고 넓었다.

형제들은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24년(인조 2) 3형제가 나란히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27년(인조 5)에 이흥발은 아우 이기발, 이생발과 함께 식년문과에 나란히 급제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이흥발이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에 인조가 홀어머니의 세 아들이 모두 학문에 힘써 조정에 출사함을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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