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송뢰(乾止松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5/05/13 [00:44]

건지송뢰(乾止松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5/05/13 [00:44]

건지송뢰(乾止松賴)는‘건지산에 부는 솔바람’이라는 말이다. <소나무송(松), 소리뢰(賴)>는‘소나무 소리’혹은‘솔바람’을 뜻한다. 건지산은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학교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송뢰는 솔숲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일컫는 말이다. 예로부터 솔바람 소리는 청아하고 기품이 있다고 하여 우리 조상들은 이를 듣고 즐겼다. 소나무의 진정한 모습은 예로부터 그림과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눈 내리는 조용한 밤에 듣는 소나무 소리를‘설야송뢰(雪夜松賴)’라고 한다.
봄의 건지산 길은 송화가루 흩날려 눈썹에 개나리꽃 피고 피부는 물씬 관솔내음, 손을 짠다면 끈끈한 송기(松肌-소나무 어린 가지의 속껍질)로 뭉킨다. 한여름 건지산 바람소리는 해조음(海潮音) 울창한 소나무 바다이다. 서해 여울 가 나달아 오는 파도처럼 옷깃 나부끼는 청아한 바람결이다.
건지산 가을은 지천으로 떨어져 무릅머리 쌓이는 솔잎 속 빠져 헤매는 태고연(太古然)한 풍색이다. 하늬바람(북서풍) 몰아때려 삼동(三冬)이 데불고 온 백설(白雪)은 땅이 그리워도 낙락(落落) 가지서 맴돌아 떨면서 한겨울을 난다는 건지산은 동이 난 양지(陽地)라 한다.
건지산(乾止山)에는 조선 왕조의 숨결인 조경단(肇慶壇.지방기념물 3호)이 있다. 조경단은 전주동물원 못 미쳐서, 덕진공원에서 나오는 길과 송천동에서 오는 길이 만나는 부근에 있다.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의 묘소는 건지산 남동록 용(龍) 수산동(首山洞)에 봉안돼 있다.
건지산은 이씨조 왕가의 지중(至重-더 없이 귀중함)한 영내(領內)인데다 후백제 이후 남방의 거진(巨鎭) 완산부성(完山府城)의 진산(鎭山)으로 받들어 높였던 산동(山洞-山村)이다.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 풀잎도 함부로 못 다루던 금역지대였다. 칙칙한 숲속은 한낮에도 어두컴컴하여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한여름 폭양에 쫓기어 이곳 숲길을 걷노라면 송뢰 바람은 선들거리는 초가을 맛이 돋는 풍치 정밀(靜謐-고요하고 편안함) 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조경단 도량으로 수백 년을 두고 자란 <세 그루> 소나무는 유난스럽게 솟구쳐 눈에 뜨이었다. 이 소나무를 삼신영목(三神靈木)인 <삼형제 소나무>라 하여 오가는 길손들은 먼발치에서라도 손을 모아 빌어야 했다.
건지산 정수리에 있다는 조개바위(蛤岩)는 꼭 조갑지를 엎어논 것과 같았다. 이 바위를 영검한 신령바위라 하여 제단을 차려놓고 건지산 정기받아 아들 낳기를 비는 아낙네들이 종종 뜨이었다. 건지산의 가을철은 산동(山洞)을 덮어 곱기도 한 주황빛 솔가루로 쌓이어 발목까지 묻히었다.
이한공(李翰公)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21대 할아버지로 신라시대 사공(司空)이란 벼슬을 지냈다. 전주이씨 선원계보에 따르면 이한을 시조로 18대인 목조까지 전주에 기거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영조 때에 논의되었던 조경단 건립은 고종 때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운 것이다. 조선 왕조는 말년에 와서야 시조의 묘소를 갖게 된 셈이다. 물론 그 때까지도 내려오던 비가 있었으나 비문이 전부 닳아 버리고 7자만 남았다고 한다.‘선원계보기략’에는 1899년(고종 광무 3) 4월 8일에 묘소 앞에 조경단을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이한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1898년(광무 2) 의정부 찬성 이종건이 건지단에 시조단을 세울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이듬해 궁내부특진관 이재곤(李載崑)을 조경단봉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으로 임명하였다. 전주에 내려온 이재곤은 건지산에 나아가 왕자봉 아래 동쪽에 산을 등진 기슭에서 봉분의 형태를 찾았다. 이곳에는 상하에 묘가 있어 상묘 하묘라고 불려왔었다. 당시 전라도감사는 이완용(李完用)이었다. 그리하여 묘 앞에 단을 쌓고, 고종이 친필로 대한조경단비(大韓肇慶壇碑)라고 쓴 조경단비를 세웠다.
경내 주변에는 돌담을 쌓고 동서남북으로 문을 두었다. 조경단 남쪽에 있는 문에서 20m 떨어진 곳에 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비석은 서향의 문과 일직선상에 대문을, 남향의 문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대리석이며, 너비 180센티미터, 두께 30센티미터, 높이 202센티미터이다. 앞면에는 고종의 어필로 대한조경단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은 한 변이 7.2미터의 정방형의 3칸 팔각지붕으로 되어있다. 비석 앞면에 새겨진‘대한조경단’이라는 글씨와 비문은 고종의 어필이다. 비각은 한 변이 7.2m인 정사각형 3칸 팔작지붕이다. 이 비문은 고종황제가 친히 짓고 당시의 명필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썼다고 전한다. 원래 조경단의 영역은 광복 전까지 450정보 곧 135만평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조경단 일대의 광대한 왕실 소유의 땅 중에서 70여만 평이 전북대학교의 부지로 불하되는 등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 조경단 영역은 약 1만여 정도이다. 조경단 둘레의 담은 1972년 이환의(李桓儀) 전북도지사(당시 전주이씨 종약원이사장)가 대통령에게 간청하여 예산을 얻어 지금과 같이 정화했다. 조경단은 그 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조경단에서는 해마다 한 차례 제사를 지낸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지산은 시민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 공연이 이뤄지는 전주소리문화의 전당이 들어섰고 생활체육 스포츠 시설이 모여 있는 체련공원도 있다. 특히 어린이에게 인기 있는 동물원도 건지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건지산 인근에 있는 오송저수지는 물병아리와 청둥오리 등 철새 휴식터이다. 덕진연못은 백로들의 먹이공간이었다. 그러나 수질이 악화돼 더 이상 철새들을 보기 힘들다. 건지산 맞은편에 가련산(可連山)이 있다. 건지산과 가련산을 제방으로 연결하여 덕진연못이 만들어진 것이다.
송천동 일대는 적송(赤松)이 울창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맑아 솔밭과 내를 가리켜 송천동(松川洞)이라고 했다. 건지산을 배경으로 한 오송제 전경, 전북대 뒷편 건지산 자락 오송제가 그곳이다. 오송제는 건지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오송제로 흘러드는 작은 물길이 낮은 지대에 습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황방산~가련산~건지산~소양천으로 이어지는 오송제 주변은 전주시 생태축의 중심에 있다. 이곳은 새들의 천국이다. 훨훨 나는 왜가리, 해오라기, 중대백로가 먼저 눈에 띄고 쇠물닭, 논병아리, 쇠오리들이 멀리 보인다. 바로 옆 숲속에는 직박구리, 멧비둘기, 박새, 어치, 할미새, 오색딱다구리가 산다. 새들이 많은 것은 습지 생태계가 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건지사(乾止寺)는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 건지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 일붕 선교종단의 사찰이다. 전주 4대 관문의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건지사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완산의 출발점은 곤지산(坤止山)이다. 전주 읍성을 중심으로 우로 돌아 건지산에 이르고 좌로 곤지산을 설정하여 천지가 상응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는 우주적 세계를 꿈꾸어온 게 전주사람들이었다. 곤지산과 건지산은 전주 읍성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 보는 형국이다. 가을이 되면 건지산은 색색의 단풍을 물들어 연지 곤지처럼 타오른다. 건지산은 30~40년 전만 해도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했던 곳이다. 그러나 솔잎혹파리 병에 걸려 모두 고사한 아픈 기억도 있다. 왕년에 전주에서 힘자랑, 주먹자랑을 하던 친구들이‘맞장’을 뜨던 추억의 싸움터이기도 하다.
(정복규 편집국장)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전주-완주 110경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