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지망월(坤止望月)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5/06/10 [00:00]

곤지망월(坤止望月)

새만금일보 | 입력 : 2015/06/10 [00:00]


 곤지망월(坤止望月)은‘곤지산(坤止山)에서 달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또는‘곤지산에서 바라보는 보름달’혹은‘곤지산에서 달맞이 하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 망월(望月)의 망(望)은 바랄망(望), 월(月)은 달월(月)로‘음력 보름날 밤에 뜨는 둥근 달’을 말하며 만월(滿月), 영월(盈月), 전월(全月)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음력 1월 15일의 만월을‘정월 대보름달’, 음력 8월 15일의 만월을‘중추명월’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날을 큰 명절로 치고, 달구경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축제를 벌인다.
 곤지산(坤止山)은 전주 남문 성 밖 천변에 위치한 초록바위산을 가리킨다. 이곳은 곤지산(坤止山)보다는 초록바위로 더 알려져 있다. 곤지산 아래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산세가 갈마음수격(渴馬飮水格)으로 말이 풀밭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초록바위라 했다고 한다. 또한 물이 많이 덮치면서 바위에 늘 이끼가 껴있어‘초록바위’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호남 제일성 전주 남문성 바로 코앞에 있는 바위산이 초록바위다. 남문 앞을 흐르는 전주천은 바로 초록바위와 연결되어 있다. 초록바위는 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동산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봉우리이다. 동산 북쪽의 밑자락을 훑어 내리는 물줄기는 남천과 합류한다. 깎아지른 산의 두 면을 물길이 감아 도는 산이고 보면 음습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곳은 언제나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이곳은 1936년에 있었던 홍수 뒤에 호안공사를 하면서 상당 부분이 깎여 나갔다. 둑이 쌓여지기 전에는 남고산 골짝에서 흐르는 반석천의 물이 부딪치는 곳으로 홍수 때는 남문 밖 장터를 정면으로 흘러 전주 성안으로 밀려들었다. 1960년대만 해도 곤지산은 모습이 뚜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대부분 사라져 옛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지금은 흑석골에서 내려오는 공수내를 건너 곤지산 밑으로 향하는 다리가 놓여 있다.
 풍수로 보는 초록바위는 곤지산이다. 어머니 산이라는 뜻이다. 초록바위의 정상에 흡월대가 있다. 잔속에 달을 받아 마신다는, 그래서 충일한 기운을 받는다는 곳이다. 어머니 산에서 달의 기운을 받아 마신다는 곳이 바로 흡월대이다. 한편 곤지산(坤止山)과 건지산(乾止山)은 전주 읍성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을 취하고 있다.
 

 곤지산은 산의 형상이 칼날처럼 뾰족하게 솟아 서슬 퍼런 곳이었다. 매년 봄이면 눈가루를 쏟아 부은 것 같은 이팝나무 꽃들이 처연하게 피어난다. 요즘도 봄이 되면 이팝나무 흰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이곳 이팝나무 서식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공수내가 복개되고 좌안도로 확장으로 심하게 잘려나간 초록바위와 곤지산은 오늘날 그 명성을 모두 잃었다. 꺼져가는 명성을 달래기라도 하듯 그나마 이팝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힘겹게 한해 한해를 넘기고 있을 뿐이다.
 한편 전주사람들에게 있어 곤지산(坤止山)은 우주적 공간의 한 축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전주사람들은 정월 대보름 곤지산에 올라 소원을 빌며 달맞이를 즐겼다. 전주십경(全州十景) 가운데 하나인 곤지망월(坤止望月)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곤지산은 이래저래 전주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곤지산은 싸전다리 건너 오른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전주천 좌안도로가 뚫리면서 심하게 잘려나갔다. 북쪽의 건지산에 대응하는 남쪽의 봉우리라는 의미의 곤지산으로 전주부성의 북문과 풍남문을 잇는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실제로 곤지산에 올라보면 전주부의 중심축을 조망할 수 있었다. 곤지산에 올라 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일곱 봉우리를 만날 수 있다. 그곳이 바로‘완산칠봉‘이다.
 흑석골에서 내려오는 공수내는 곤지산 자락 초록바위에 부딪쳐 방향을 틀어 전주부를 향해 달려드는 형국이었다. 지금은 복개 공사가 이루어져 하천이라기보다는 하수구와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예전에 장마가 지거나 하여 물길이 밀려들 때는 전주천 물길을 북쪽으로 밀어 남부시장을 잠기게 하곤 했다.
 전주천의 물길이 한벽당을 돌아 서쪽으로 흐르면 남고산성에서 흘러내리는 남고천의 물길과 공수내가 전주천의 물을 남에서 북으로 밀어붙이는 형세여서 전주부성은 범람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한벽당에서 남문에 이르는 제방은 조선 초부터 쌓여지기 시작했다.‘공수내’라는 이름은 곤지산과 초록바위를 물로 공격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오래 전부터 곤지산 초록바위는 사형터로 알려져 있었다. 이곳은 바위 벼랑에 있는 나뭇가지에서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무서움이 감돌았다. 귀신의 울음소리라도 들릴 만하다 싶을 만큼 소름이 돋았던 곳이다. 망나니들이 칼을 휘두르면서 목을 쳤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낮에 지나갈 때도 으스스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죄인의 목을 잘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곤지산 꼭대기에 있는 소나무에 메달아 두었다. 그래서 초록바위는 후대 사람들이 전주의 3대 바람통(바람퉁이)로 손꼽은 곳이기도 하다. 바람이 시원한 세 곳을 가리키는 3대 바람통은 좁은목, 초록바위, 숲정이였다. 이 세 곳은 모두 사실 지형상 시원한 곳임에는 틀림없다.
 이런데다가 초록바위와 숲정이는 사람들까지 처형된 곳이었으니 오죽 했을까 싶다. 이 부근에서는 모두 구천을 떠돌던 원혼들이 눈을 부리고 있어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이처럼 곤지산(坤止山)은 전주 역사에 회한의 설움을 담고 있는 곳이다. 산의 형상이 칼날처럼 뾰족하게 솟아 서슬 퍼런 점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개남 장군을 처형한 곳이기도 하며 천주교 신자를 메달아 노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 병인박해 기간인 1866년,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인 남종삼(요한)의 15세 된 아들 남명희(명학)와 순교자 홍봉주(도마)의 아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곳이다. 이 두 가정은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노륙지전(孥戮之典)’의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당시 두 어린 아들은 나이가 모두 열네 살이었다.
 이들은 나이가 어려서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들이 열다섯 살이 되기까지 일 년을 옥에 가두어 두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두었다. 개종을 하고 천주님만 부정하면 멸문의 화는 면하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소년의 선택은 단호했으며 결국 감옥에 들어간 지 일 년 만인 열다섯 살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 초록 바위 밑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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