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융마(九進戎馬)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5/07/01 [00:49]

구진융마(九進戎馬)

새만금일보 | 입력 : 2015/07/01 [00:49]

구진융마(九進戎馬)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의‘구진벌 전쟁터의 모습’을 말한다. 융마(戎馬)는 병기 융(戎), 말 마(馬)로‘전쟁에 쓰는 군마’혹은‘수레와 말’등을 가리킨다. 융마(戎馬)는‘군대’또는‘전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진벌은 임진왜란 때 이정란 장군이 왜군과 일대 접전을 벌인 현장이다. 무려 아홉 번 나아가고 아홉 번 후퇴했다는‘구진구퇴(九進九退)’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구진(九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1572) 7월 곰치재(熊峙) 싸움은 사산혈해(死山血海)라 했다. 왜군들은 격전의 혈로를 뚫고 부성의 동북쪽 안덕원(安德院)까지 풍운같이 쳐들어왔다. 그때 부성을 지키던 수비장(守備將)은 소모사(召募使) 이정란이었다. 철통같은 수비 태세에 사나웁기로 이름떨친 적장 <고바야가와 다까가게(小早川隆景)>도 성을 깨지 못하고 후퇴하여 본진에 뭉쳐 화심방천(花心防天) 벌 안을 끼고 일대 회전을 벌였다.
그 전황은 땅은 타고 하늘은 끄슬려 구진구퇴(九進九退)의 아수라 싸움이었다. 그렇듯 하늘과 땅을 노을꽃 피듯이 피바다로 불들인 혈전을 몰고 왔대서 황운리(黃雲里)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늘날 곰치재 마루턱 못 미쳐 후비진 골짝에는 천인총(天人塚)과 신도비가 있다.
천인총은 왜군들이 우리 군사들의 충의에 감탄한 나머지 시신들을 거두어 묻어주고 목표(木標)를 세운 곳이다. 목비(木碑)에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 새기고 금산 본진(本陣)으로 퇴각했다.
임진왜란에 앞서 아득한 옛날이다. 신라 태종(김춘추)은 백제를 병탄(倂 呑)한 다음 해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의 패주 병력들의 소탕에 나섰다. 백제군과 최후의 결전을 맞았던 곳도 바로 이곳 구진융마(九進戎馬)의 현장이다.
소양면 화심리에서 진안 쪽 모래재로 조금만 가다보면 왜란 당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웅치 고개가 나온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구진벌은 물론 웅치 고개도 모두 전쟁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인 웅치전적지(熊峙戰蹟地)가 있을 뿐이다.
웅치전적비는 지난 1976년 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워졌다. 현재 구진(九津) 마을은 소양면 화심리에서 가장 많은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또 유명한 화심 순두부집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구진리 마을은 현재 한자로 구진(九津), 구진(龜津), 구진(求進) 등 세 가지로 쓰이고 있다. 구진마을은 원래 구진리(求進里)라 불렸다고 한다. 구진(求進)이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구진(求進)은 구할구(求), 나아갈진(進)으로‘나오기를 구했다’라는 의미다.
이 마을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게 될 때 이에 반대해 이 마을로 내려와 숨어살고 있던 전주최씨 만육공 최양에서 비롯됐다. 태종 이방원은 임금이 된 뒤 최양에게‘벼슬길에 나와 달라’고 간곡히 간청했다. 그러나 만육공 최양은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끝까지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길에‘나오기를 구했다’는 의미에서 구진(求進)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또한 최양의 고집을 두고 이때부터‘최고집’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따라서 구진(九津)은 구진(求進)의 잘못된 표기라는 지적이 있다. 또한 일부 마을 주민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이 마을에 위치한 거북형상의 바위 때문에 거북구(龜)를 써서 처음에는 구진(龜津)으로 불리던 것이 차츰 구진(九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융마(戎馬)라는 말은 조선조 시인 신광수(申光洙)가 지은 공령시(功令詩:과거 때 쓰는 시체(詩體))‘관산융마(關山戎馬)’에 나온다. 이 과시(科詩)의 글제(題)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의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악양루에 올라 관산의 전쟁을 탄식함)'였다. 이 시는 두보가 만년에 천하를 유랑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에 올라 안녹산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한탄한 오언율시이다.
구진벌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이정란 장군은 조선 선조 때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전주성을 지키고 국난 극복에 이바지한 공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에 있는 충경사는 이정란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전의이씨 후손인 이정란은 1529년(중종 24) 전주에서 태어났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정6품)으로 승진되었으나 곧 해미현감으로 좌천되어 잠시 관직을 그만 두었다. 1581년 다시 전적으로 기용되었으나 정쟁 속에서 부지하지 못하고 6년 동안 불우한 세월을 보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인 1592년 봄 이정란은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있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64세의 노령이었다.
왜적이 부산진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이 적에게 짓밟히고, 2개월 뒤에 평양성이 함락됐다. 마침내 금산성이 적에게 함락되는 등 전라도도 위기의 상황에 직면했다. 왜적은 용담과 진안을 공격하고 곰티를 거쳐 이치를 통하여 전주를 공격하고자 했다.
이 때 이정란은 의병 7백여 명을 모집하여 객사문 밖에 장단을 설치하고 만마동에 복병을 설치했다. 남고산의 억경대의 위아래에 매복하게 하여 정탐하러 온 왜적 4명을 생포하기도 했다. 왜적이 전주 부중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 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이정란은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에 임명됐다. 그는 적이 물러간 뒤 전주 부성에 돌아와 전란의 수습에 노력하였다. 이정란은 선조 33년(1600)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복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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