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령덕담(耆寧德談)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5/07/08 [00:17]

기령덕담(耆寧德談)

새만금일보 | 입력 : 2015/07/08 [00:17]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 1가 25-1에 있는 기령당(耆寧堂)은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이다. 이곳은 완산동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다. 기령당(耆寧堂)의 '늙을 기(耆)'는 60세를 가리키는 말로 이곳의 회원 자격은 60세 이상이다. 반면에 '노인 노(老)'는 70세를 뜻한다. 령(寧)은 편안할 령이다. 굳이 풀이를 한다면 기령당에서 덕담을 듣는다는 말이다.
기령당이란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어르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기령당은 올 2015년 지난 5월 27일 창당 418주년을 맞이했다. 기령당은 전라관찰사나 전주부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다. 지금도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정치인과 기관장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이곳에 들러 덕담(德談)을 듣고 간다.
현종(顯宗)때 세운 군자정(君子亭)을 오늘날에는 기령당이라고 한다. 본래 군자정은 용두봉을 지나 반선봉을 건너 옥적봉인 빙고동 아래 부지에 있었다. 영조(英祖)때 서문 밖 민가에 큰 불이 일어났었는데 뜻밖에 광풍이 몰아쳐 삽시간에 부성 안은 화염에 휩싸였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은 단숨에 서천을 넘어 군자정까지 태워버렸다. 그 때 홀연히 군자정의 현판은 불길에도 타지 않은 채 하늘높이 솟아 올랐다가 이곳 잔등에 떨어지자 지신(地神)의 조짐이라 하여 선비들이 목욕재계하고 다시 군자정을 세웠는데 현재는 기령당(耆寧堂)이라고 한다.
기령당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전주부의 서쪽 용두사, 지금의 용머리 고개 동쪽에 군자정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기령당의 시초로 되었다. 그 후 기령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주 유지들이 드나드는 경로당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령당의 역사를 보면 선조시대 양난을 거친 후 상무정신을 드높이고자, 1663년에 용두치 동쪽 기슭에 군자정을 지어 활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126년 뒤인 정조 무신년 9월에 남서쪽 높은 곳 즉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과녁을 그 남서쪽에 두었던 것이다.
이에 신유(1921) 중춘에 이르러 진사 이건호가 완산동에 있는 가옥과 대지를 기증하고, 여기를 머물 곳으로 정하고 기령당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또 계해(1923)에 박기순의 도움을 받아 초가를 벗기고 와가로 일신하였으나 항상 경비가 넉넉지 못함을 걱정하였다. 다행히 경오년(1930) 가을에 갑부 백인기와 박영철이 건물 등을 기증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기령당은 회원수가 60여명에 이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관도 있어 학생들에게 한문도 가르친다. 재물을 희사한 기록과 이곳 풍광을 적은 30여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기령당 건물에는 이삼만, 이건호, 송성용 등의 작품이 있으며, 기령당 뒤쪽에는 송석정이 자리하고 송림 사이에 버티고 있다.
송석정은 완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전주천 맑은 물이 흐르고, 좌우에는 다가산과 곤지산이 감싸고 있다. 이 정자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책방거리로 알려진 완산교와 서문교회가 바라보인다.
예전에는 송석정 바로 밑은 서천교를 넘어 정읍 가는 행인들이 지나가는 중요 도로이다. 소나무가 많아 은송리라고 불렀다. 송석정은 멋진 정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이곳에 오르면 도심 속에서 속세를 떠난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마을 가운데는 1920년 초에 지은 백운정, 청학루라는 누각과 정자가 있었다. 당시 전주 부호 박기순이 사재로 건축한 것을 1931년 시민의 유희장으로 사용하도록 전주읍사무소에 기부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있다.
이후 예식장, 국악원 분원으로 사용되다 현재는 그 자리에 태화아파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주민은 여전히 이곳을 백운정길, 청학루길이라고 불렀다. 완산동에는 백운정, 청학루가 있었는데 전주의 유지와 일본 사람들이 모여 파티를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기생들도 드나들었고 인근에 사는 이들은 기생 옷을 빨고 돈벌이를 하기도 했다. 옷이 어찌나 이쁘던지 빨아서 한 번 슬쩍슬쩍 입어보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한다. 완산동은 일제강점기 마을과 해방 이후 새로 형성된 산동네, 본래의 청학루· 백운정· 기령당 등의 상류문화, 1970~80년대 부촌의 양옥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다.
기령당 대문에 걸려 있는 '耆寧堂(기령당) 편액은 설송 최규상(崔圭祥)의 글씨이다. 최규상은 1891년 지금의 전북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문성공 최아(崔阿)의 22세손이다. 아버지 최보열은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난 유학자로서,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에 있는 무성서원의 도내 장의(掌議)와 만경군 도헌(都憲)을 지냈다.
기령당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구석에 '연수정(延壽井)' 비석이 있다. 아마도 이곳에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당에 있었다는 보호수인 노거수(老巨樹)는 몇 년 전에 태풍 피해로 고사(枯死)했다. 영춘각(永春閣), 기령당(耆寧堂) 그리고 사무사(思無邪) 편액 글씨도 있다. 방안에는 역대 당장(堂長)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림, 글씨, 사진 등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1996년에 작성한 기령당의 대문신축기(大門新築記), 인당 이영균(仁堂 李榮均,1913~2000)의 '시화연풍(時和年豊)'도 있다. 인당은 효산 이광열 선생의 아들로 금추 이남호에게 사사하였고 인물화를 잘 그렸다.
(정복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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