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화암(佛明花巖)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5/12/16 [00:24]

불명화암(佛明花巖)

새만금일보 | 입력 : 2015/12/16 [00:24]

불명화암(佛明花巖)은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불명산 기슭의 숨은 천년고찰 완주 화암사(花巖寺)를 말한다. 화암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694년)에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설총도 한때 이곳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한다.
늦가을 화암사로 길은 정말 아름답다. 푹신한 낙엽이 융단처럼 깔려 있는 숲길을 지나면 작은 협곡이 나타난다. 가을 가뭄에 물은 이미 말라 버렸지만 이끼 가득한 바위 절벽이 지난여름의 풍성했던 계곡 풍경을 전해준다. 협곡이 끝나는 곳에 있는 철제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계곡과 절벽, 숲으로 둘러싸인 화암사에 이르게 된다.
깊은 계곡 속 큰 바위 위의 작은 절인 화암사는 따로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다. 누각이 입구다. 누각(우화루)에 걸린‘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부터‘적묵당(寂默堂)’과‘우화루(雨花樓)’그리고‘극락전(極樂殿)’등 현판은 모두가 오래됐다. 아마도 400년 전 해당 건물을 준공하면서 걸었던 현판일 것 같다.
궁궐이나 사찰, 서원 등 옛 건물의 편액은 명칭을 가로로 쓴 형태가 일반적이다. 간혹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 이유로 세로로 건물 이름을 써 만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편액에 건물 명칭을 모두 담고 있다.
이와 달리 화암사 극락전(極樂殿) 편액은 한 자씩 따로 편액을 만들었다. 하나의 나무판에 한 글자씩 쓴 것이다. 옛 편액 중에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극락전 건물 자체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가 2011년 11월에 국보 제316호로 승격된 소중한 문화재다.
극락전 편액의 글씨는 잘 보일 수 있도록 굵은 획으로 최대한 크고 힘 있는 해서로 썼다. 그리고 한 자씩 따로 판자를 사용해 글씨를 새겨 만들었는다. 글씨를 가장 크게 담을 수 있도록 테두리도 없이 편액을 만들었다. 편액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글씨가 꽉 찬 상태다.
현재 극락전은 1981년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따르면, 1605년(선조 38)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극락전은 특히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下昻式) 건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앙식은 건물 바깥쪽에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 지렛대 원리를 통해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다.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목재인 하앙은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아 처마와 지붕의 무게를 균등하게 받쳐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사찰은 창건과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옛날 어느 임금의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는데, 어느 날 임금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조그마한 꽃잎 하나를 던져주고 사라졌다.
잠을 깬 임금은 사방을 수소문해서 그 꽃을 찾게 했다. 불명산 깊은 계곡 속 큰 바위에 핀 복수초였다. 임금은 신하들을 보내 그 꽃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연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다른 신하들은 모두 도망가고, 용감한 신하 한 명이 그 꽃을 꺾어 돌아왔다. 공주는 꽃을 먹고 깨끗하게 병이 나았다. 임금은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절을 짓고 화암사라 불렀다.
화암사의 대표적 문화재로 극락전과 더불어 우화루가 있다. 우화루는 보물(제662호)로 지정돼 있다. 사찰 대문 역할을 하기도 하는 우화루는 사찰 입구에서 보면 돌로 쌓은 축대 앞에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놓아 2층 누각처럼 보인다.
반면 누각 뒤에 있는 극락전에서 보면 누각 마룻바닥이 극락전 앞마당과 같은 높이로 되어 있어 단층 건물로 보인다. 극락전 쪽은 트여 있지만, 맞은편은 널판지로 막고 창문을 내었다. 양옆은 흙벽으로 쌓았는데, 매우 낡았지만 멋지고 고색창연한 벽화가 눈길을 끈다.
현재의 우화루 건물은 161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극락전 동쪽 옆 작은 건물에 걸린‘철영재(英齋)’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자하(紫霞)’라는 낙관 글씨가 있어 호가 자하(紫霞)인 신위(1769∼1845)의 글씨로 보인다. 글자 뜻풀이로는‘꽃봉오리 향기를 맡는 집’이라는 뜻으로 대충 풀이할 수 있겠으나, 사찰에서는‘말을 삼가는 집’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신위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현판 글씨를 남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서예가로, 이정·유덕장과 함께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화암사는 그 흔한 일주문도 없다. <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 >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우화루 왼편 대문이 절로 들어가는 통로다. 누각 아래 문을 만들어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금은 완고한 성벽처럼 돌로 단단히 막아놓았다. 누각의 문이나 창도 널벽으로 막아두어 곧 쳐들어오는 적들과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마치 대갓집의 대문 같은 입구를 지나면서 좌우를 두리번거려 보지만 금강역사(金剛力士)나 사대천왕(四大天王)을 찾아볼 수 없다. 악귀가 들어올 만큼 변변한 절이 못되는지, 아니면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자신감 때문인지 잘 분간을 가지는 않지만 마음은 편하다. 대문을 지나면 문간채가 나온다.
이 절에는 우리 건축사에 길이 남을 하앙(下昻, 지붕과 기둥 사이에 끼워 지붕의 무게를 떠받치도록 한 목재)이 있는 극락전(보물 제663호)이 있다. 하앙식 구조는 백제 때 유행하던 방식으로 중국과 일본에선 흔하지만 국내엔 극락전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복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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