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요대(梧木瑤臺)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6/02/17 [00:59]

오목요대(梧木瑤臺)

새만금일보 | 입력 : 2016/02/17 [00:59]

오목요대(梧木瑤臺)는‘오목대의 아름다운 모습’을 말한다. 요대(瑤臺)는아름다울 요(瑤), 물건을 얹는 대(臺)로‘옥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누대’를 의미한다. 오목대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있으며 이목대와 마주하고 있다. 오목대는 전북 지방기념물 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옛날에 오동나무와 배나무가 가득하여 '오목대' 그리고‘이목대’라고 하였다.

오목대는 전주이씨 시조의 위패를 봉안한 경기전에서 동북쪽으로 5백미터 지점 언덕에 있다. 남서쪽의 언덕 기슭은 벼랑을 이루고 있으며 옛날에는 전주천의 물줄기가 이 밑으로 흘렀다. 동쪽의 승암산에서 뻗어 오목대로 이어지는 산맥을 발산이라 한다. 발산은 오목대 뒤 중바위로 오르는 산을 말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발산과 오목대는 이어진 산맥이었으나 전라선의 철도 부설로 단절되었다. 오목대는 비록 아담한 산이긴 하지만 다가산과 더불어 전주사람들에게는 가장 친근한 놀이터이다.

오목대는 언덕의 이름이 아닌 거의 비석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비각 주변으로 철제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으나 근래에 이를 모두 철거하여 비각 앞까지 갈 수 있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전주이씨 발상지로서 여러가지 유서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조선 창업의 모든 설화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오목대는 조선왕조의 모태와도 같은 곳이다.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면 70m 윗쪽으로 천주교의 성지 치명자산이 있는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있는데, 건물이 있는 80m 아래쪽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이목대 비각에는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목조대왕 구거 유지'라는 비석이 있는데 1900년(광조4년)에 세워진 것이다. 바로 이 도량이 조선태조 이성계의 5대조 목조 이안사의 유허로서 시조 이 한 때부터 목조에 이르기까지 누대를 이어오는 동안 전주의 토호로서 살았던 유적지이다.

목조는 이태조의 5대조인 이안사(李安社)를 가리키는데 이 부근이 그의 태생지로 전해온다.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부로 당초 전주의 유력한 세력가였다. 이때는 몽고군의 고려 침략이 한창이었던 고종 후반기였다. 이안사는 그가 아끼던 관기(官妓)의 일로 지주(知州)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문제가 생겨 전주(全州)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 두타산성에 의지해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때 그를 따라 삼척으로 옮긴 민호가 1백 70여 호였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우기 12년 전인 고려 우왕 6년(1380년) 남원 운봉에서 왜적을 무찌른 황산대첩 직후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벌였다. 오목대는 이성계가 새 나라를 세울 의사를 은연중 밝혔던 곳으로 유명하다.

고려가 한참 기울어져 가던 14세기 후반, 왜구는 고려와 명나라를 번갈아 침범하며 마구잡이 약탈을 일삼았다. 고려 정부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강화도까지 왜구의 공격을 받고 선왕의 어진(御眞)까지 빼앗길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최무선이 화약을 개발, 1380년 진포(鎭浦,금강 하류)에서 왜선 500척을 격파하고, 왜구 수천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요행히도 목숨을 건진 왜구들은 배를 버리고 옥천, 상주 등의 내륙지역으로 침투, 계속해서 고려를 위협했다.

고려 조정은 이성계를 삼도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한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의 이지란과 함께 남원으로 내려가, 운봉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아지발도의 왜구를 완전 소탕했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이성계는 대승을 거두고 귀경하던 중, 선조들의 땅인 전주에 이르러 전주이씨 종친들을 불러 모아 오목대에서 잔치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흥에 겨운 나머지 한나라 고조의‘대풍가(大風歌)’를 큰 소리로 불렀다. 유방은 숙적 항우를 타도하고, 통일국가를 실현시킨 뒤 유방은 고향인 패(沛)로 개선하여 연회를 개최했다. 연회가 무르익자 유방은 스스로 악기를 들고 즉흥시를 읊었다.‘큰바람이 일고 구름은 높이 날아가네. 위풍을 해내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네. 내 어찌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키지 않을소냐(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이성계는 연회장에서 대풍가를 통해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울 뜻을 은근히 내비쳤다.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함께 온 정몽주는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서 남고산 만경대(萬景臺)에 올라가 개경이 보이는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고는 한 숨을 쉬었다.‘천길 높은 산에 비낀 돌길을 홀로 다다르니/ 가슴에는 시름이여 청산에 깊이 잠겨/ 맹세턴 부여국은 누른 잎 휘휘 날려 백제성에 쌓였네/ 9월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깊고/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하늘의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마주치는데/ 하염없이 고개 돌려 옥경(玉京.개경)만 바라보네/‘

1900년 고종은 태조를 기리기 위해 오목대 정상에 비석을 세우고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고 친필로 썼다. 여기서 '태조고황제'는 고종이 1897년 황제 위(位)에 오르면서 태조에게 올린 시호(諡號)이다.

그리고‘주필(駐蹕)’이란 임금이 머무른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주사람들에게 오목대는 특별한 곳이다. 중바위 자락에서 이어지는 발산이 그렇고 옥류동, 자만동, 간납대 등 전주라는 도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복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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