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제백련(雲梯白蓮)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6/03/02 [00:08]

운제백련(雲梯白蓮)

새만금일보 | 입력 : 2016/03/02 [00:08]

운제백련(雲梯白蓮)은‘운제골의 흰 연꽃’을 말한다. 백련(白蓮)은 흰 백(白), 연꽃 련(蓮)으로‘흰 연꽃’을 뜻한다. 운제백련(雲梯白蓮)은 오늘날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다. 완산승경 가운데 하나이지만 매우 생소한 곳이다. 따라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운제골은 전북 완주군 화산면 운제리의 지명이다. 운제리(雲梯里)는 본래 운제현이 있던 곳이다. 조선 태조 원년(1392)에 고산현에 편입되어 운제골이 되었다. 그 뒤 고종 32년(1895)에 운서하면에 편입되어 운제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운제리 옥포리 석교리의 각 일부가 병합되고 운제리라 하여 화산면에 편입되었다. 전에 운제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경천저수지로 들어가고 지금은 법정 리명만 남았다. 운제마을은 운제현의 치소였다. 화산면은 본래 고산군 지역으로 옛 운제현의 서쪽이 되므로 운서하면이라 하였다. 1914년 19개 동리를 병합하여 화개산의 이름을 따서 화산면이라 하여 운산, 우월, 화월, 운곡, 춘산, 화평, 운제의 7개 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한편 완주군 화산면은 완주군 경천면(庚川面)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경천면 가천리(佳川里) 불명산 기슭에는 유명한 사찰로 화암사가 있다. 화암사에는 연화공주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따라서 화암사는 운제백련(雲梯白蓮)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

운제리는 본래 운제현이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운제현은 예전에 오늘날의 행정구역인 경천면과 화산면 그리고 운주면 일대를 모두 관할했던 큰 행정구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화암사가 위치한 경천면 가천리 일대도 운제현의 관할 구역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튼 화암사의 연화공주 이야기를 소개한다. 옛날에 임금의 귀여운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한 달이 다 되도록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훌륭한 의사, 좋다는 약도 공주의 병에는 모두 허사였다.

임금은 어느 날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은 딸의 마지막 소원을 빌기 위해 절에 나가 정성껏 불공을 드렸다. 그날따라 많은 비가 내렸다. 비에 흠뻑 젖은 임금은 궁에 오자마자 추위와 피곤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임금 앞에 나타난 것은 평소 임금이 자주 다니던 절에 있는 부처님이었다. 부처님은 얼굴에 연꽃 같은 환한 웃음을 머금고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비로운 얼굴로“이미 너의 갸륵한 불심에 감동하여 연화공주의 병을 낫게 할 것을 알려 줄 터이니 그리 알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왕 앞에 조그마한 연꽃잎 하나를 던져 주고는 사라졌다. 때는 엄동설한이라 연꽃이 없을 터인데도 부처님이 연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왕은 연꽃을 조심스럽게 받아 쥐고 기뻐했다.

깜빡 잠에서 깨어난 임금님은 연꽃을 찾아보려 했으나 연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며칠이 지난 뒤였다. 부처님이 임금님께 일러준 연꽃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임금께 알려졌다.

연꽃이 피어 있는 것은 지금의 완주군 깊은 산봉우리 바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겨울에 연꽃이 피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연꽃이 연못에 피지 않고 산중 높은 산 바위 위에서 피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님은 이는 분명히 하늘이 내려준 은혜의 꽃이라고 생각하고 몇몇 신하들에게 조심스럽게 꽃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신하들은 며칠이 걸려 연꽃이 핀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는 누가 오르내렸는지 모르나 길이 훤히 트여 있었다.

신하 중에 한 사람이 이상히 여기고 꽃을 꺾으려다 말고 다른 일행들에게“아무래도 이런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먼 곳에 숨어서 이곳에 누가 이 연꽃을 키우고 있는가를 알아보자.”고 말했다. 얼마를 지났을까, 난데없이 산 밑에 있는 연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산위로 올라가 연꽃에 물을 뿌려주고는 다시 연못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이 엄청난 광경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덜덜 떨고만 있었다. 그 중에 기운이 세고 담력이 큰 몇 사람만이 겨우 연꽃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연꽃을 먹게 된 공주는 언제 그런 무서운 병에 걸렸었느냐는 듯이 금방 여름아침 연꽃처럼 활짝 피는 것이었다.

임금님을 비롯한 왕비와 모든 신하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임금님은 부처님의 고마운 은덕을 깨닫고 더욱 불심에 깊게 파고들었으며 연꽃이 있던 곳에 커다란 절을 짓고 부처를 모시게 했다.

임금님과 많은 신하들이 이곳에 와 불공을 드리는 한편 이 절 이름을 화암사라 지었다. 화암사란 바위 위에 꽃이 피었다는 뜻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화암사 입구 계곡에는 3단 폭포가 있는데 그 이름이 비룡폭포이다. 그리고 화암사의 우화루의 우화(雨花)는‘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화암사는 694년(신라 진성여왕 3) 일교국사가 창건하였으며, 부분적인 중건 중수를 거쳐 1425년(세종 7) 해총(海聰)이 중창하였다. 불명산의 원시림이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이곳에서 원효, 의상대사가 수도하였고, 설총이 공부하였다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금산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국내 유일의 하앙식 건축양식인 화암사 극락전(보물 663), 한국 고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화암사 우화루(보물 662)를 비롯해 화암사 동종(전북유형문화재 40), 화암사 중창비(전북유형문화재 94) 등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극락전은 1425년에 세워진 불전 건물이다. 극락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셨고, 전통적인 탱화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고승들의 영정 7폭을 보존하고 있다. 우화루는 사찰 전방에 일반적으로 놓이는 누각 형식의 건물이다.

(정복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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