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석동학(隱石洞壑)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6/04/06 [00:48]

은석동학(隱石洞壑)

새만금일보 | 입력 : 2016/04/06 [00:48]

은석동학(隱石洞壑)은‘은석골 일대의 경치’를 말한다. 동학(洞壑)은 동녘 동(東), 골짜기 학(壑)은‘산과 내가 둘러 있어 경치가 좋은 곳’을 뜻하며 동천(洞天)이라고도 한다. 은석골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에 있다. 전주에서 남원 쪽으로 6킬로미터 쯤 가다보면 전주천 건너편에 고덕산 줄기의 은석골이 있다. 옛날부터 한증막으로 유명해 피서객이 발길이 줄을 잇는 곳이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룬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방천을 낀 은석제의 물이랑이 시원스럽다.
파수대, 만궁봉, 관혁봉 등 우뚝 솟은 기암괴석에 묻힌 산허리 골짝마다 석간수가 흐른다. 석간수를 따라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의 정취에 동화된다고 하여 은석동학(隱石洞壑)이라고 했다. 호반을 따라 돌길로 돌아 오르면 풍요롭고 요염한 도원경을 이룬다. 그 옛날 병자호란 때 투숙객은 이곳 정취를 상찬하여 석지정, 제월정 등을 짓고 천엽동 만수동이라 불렀다.
그밖에 낙지암, 도량 유지를 끼고 돋아난 쇄월대, 학소대, 선운대, 월영대, 모란대 등의 봉우리들이 널려 있다. 운귀암, 월태암, 나한암, 무영암 등 주변은 예부터 운치골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은석골 주변의 수박동, 잉어소, 박모산 등은 박 진의 효성이 젖은 곳이다. 죽음골은 또 완주군 상관면 돌안을 들춰 삼승반촌이요 칠정지로 알려진 곳이다. 여름철 수많은 피서객이 찾아드는 은석골은 계곡의 맑은 물도 유명하다. 발원지를 떠난 전주천은 완주군 상관면의 만마관(萬馬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한데 합쳐져 급한 물살을 이룬 채 전주 쪽을 향하다가 색장동(塞墻洞)에 다다른다. 원색장 마을, 죽음(竹陰)마을과 함께 색장동을 구성하는 은석골 앞에서 전주천은 유유히 흘러 나간다. 명문장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이곳을 가리켜, 일곱 정자 아랫마을은 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라고 말했다.
이곳은 역사 속의 인물 정여립의 비극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 인백(仁佰) 정여립(鄭汝立,1546-1589)은 전주 남문 밖 자만동(현 완주군 상관면 색장리 한뎃벌, 전주 한벽루 상류)에서 동래정씨(東萊鄭氏) 첨정(종4품) 정희증(鄭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연도는 명확치 않으나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중종-인종 연간으로 추정된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전주남문 근교에 살았다. 정여립은 청소년 시절에 익산군수였던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여 간혹 일을 처리할 정도로 영특하고도 조숙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전들은 군수보다는 그의 아들 정여립을 더 어려워했다.
그는 1570년 (선조 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서울에서 율곡 이 이, 우계 성 혼 등 당대 석학들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해 있는 해박한 지식을 일찍부터 인정받았다.
1580년(선조 14년)에 예조좌랑, 1583년에 홍문관 수찬(修撰) 벼슬에 올랐으나 정여립은 당파 싸움의 틈바귀에 끼여 울적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벼슬길을 버리고 젊은 나이에 전주로 낙향했다. 그는 고향 마을에서 가까운 죽음마을 앞 파수대(把手臺)에 거처를 정한 다음 산천경개를 벗 삼으며 후학들에게 경학을 가르치는 일로 소일했다. 그 후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상경한 정여립은 재차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갈수록 우심해지는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또다시 벼슬길을 버린 채 낙향하고 말았다.
낙향 후 그는 진안의 죽도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길렀고, 그의 문하생들은 그를 가리켜 '죽도선생' 이라 불렀다. 또한 그의 높은 명성을 듣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강호의 명사 및 인재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신분의 귀천을 두지 않고 사귀기 위해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바로 그 대동계원들이 매월 보름날 한자리에 모여 말을 달리고 활을 쏘고 창과 칼을 쓰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곳이 바로 은석골을 중심으로 파수대, 관혁봉, 만궁봉 등을 아우르는 일대이다.
정여립의 대동계는 1587년 왜구가 전라도 해안지방을 침노하여 노략질을 일삼을 때 전주판관 남언경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 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 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러나 당시 항간에 구전되던‘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목자망전읍흥-木子亡奠邑興)’이라는 도참설로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치부된다. 그의 대동계 조직도 조정에서 그에게 역모의 혐의를 씌우는 데 결정적인 증거로 이용된다. 결국 일세의 풍운아 정여립은 은석골 파수대에서 갈고 닦은 경륜을 나라를 위해 제대로 한 번 펴보지도 못한 채 역모의 수괴로 몰려 쫓긴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 준과 안악군수 이 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1589년 진안 죽도의 농막에서 그 파란 많았던 생애를 자결로 끝맺고 말았다.
정여립은 평소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 이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서인과 동인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는 조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정복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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