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천엽(竹林千葉)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6/06/01 [00:00]

죽림천엽(竹林千葉)

새만금일보 | 입력 : 2016/06/01 [00:00]

죽림천엽(竹林千葉)의 현장은 전북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에 있다. 죽림천엽(竹林千葉)은‘죽림리의 아흔아홉 구비’를 말한다. 천엽(千葉)은 일천 천(千), 잎사귀 엽(葉)으로‘여러 겹으로 된 꽃잎’을 의미한다. 여기서 천엽(千葉)은‘아흔아홉 구비’를 비유해서 표현했다. 죽림천엽(竹林千葉)은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철로가 깔리고 개발이 되면서 옛 모습은 대부분 없어졌다.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에서 서쪽으로 나가 상관천을 건너면 공기골에 들어선다. 그래서 죽림리(竹林里)는 공기동(孔基洞 혹은 孔器洞)이라고도 한다. 공기골(인근 동서학동도 해당됨)은 아흔아홉 고개의 골짜기를 지녔다. 높은 골짜기라서 산새의 울음소리와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신선들이 풍월하는 듯했다.

죽림리는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이 붓과 더불어 한평생을 살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에는 창암이 40여 년을 서예에만 전진하며 살던 집터가 보존돼 있다. 초명은 규환(奎奐) 또는 규환(奎煥)이었다. 그러나 학문, 교우, 취처 등 세 가지가 늦었다는 뜻으로 삼만(三晩)이라 개명하였다. 이삼만은 중년이 되면서 공기골 골짝에 찾아 들어와서 그윽한 묵향 속에서 필봉을 가다듬어 유수체를 이룩하고 제자들을 지도했다.

창암은 혹독한 수련으로 예술적 경지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글씨쓰기에 몰두하여 벼루를 세 개나 구멍을 내었다. 이삼만은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로 알려졌던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를 배웠다. 초서에 능했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체라고 부르기도 한다.

창암은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로 지칭되는 추사 김정희에 비길만한 인물이다. 추사는 북학의 한 계통으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직접 수용하고 그것을 조선에 뿌리내리고자 했던 개혁적인 유학파 인물이었다. 반면 창암은 혹독한 자기수련과 공부로 조선의 고유색을 드러낸 국내파 지식인이었다.

창암은 스스로 진나라 주 정과 당나라 유공권 그리고 신라시대 김 생의 글씨를 토대로 글씨 공부를 하였다. 또한 위진시대 고법을 근간으로 하여 자신의 필법을 확립해 나갔다. 창암은 서예를 단순한 기예에 머물지 않고 학문적으로 바라보려는 진지한 태도를 가졌다.

전라도 도처에서 그가 쓴 편액(扁額)을 볼 수 있다. 경상남도 하동의 칠불암(七佛庵)의 편액(扁額), 전주판(全州板)‘칠서(七書)’전주 옥류동(玉流洞 : 현 교동) 월당지반(月塘池畔)의 바위에 새긴‘취리건곤한중일월(醉裡乾坤閑中日月)’과 옥류동 고개바위에 새긴‘연비어약(鳶飛魚躍)’이란 큰 글자 등이 있다.

그가 자신의 회갑 때 쓴 자서문(自敍文)에 의하면‘우연히 진(晋)나라 사람 주 정(周珽)이 쓴 비단 바탕의 글씨를 얻어 당나라 때의 여러 명필에 못지않다고 여겼다. 또한 서울에서 류공권(柳公權)의 전적(典籍)을 얻게 되어 옛사람의 붓을 다룬 뜻을 밝히고 만년에는 신라 김 생(金生)의 글씨를 얻어 옛사람의 글씨 획이 실하고 슬기로움을 알았다.”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해 창암은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삼만과 동시대를 살았던 당시 조선의 대표적 명필은 호서(湖西)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호남의 창암(蒼岩) 이삼만(李三晩), 강서(江西)의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 등을 꼽는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되어 제주도 귀양길에 전주부성을 지날 때 지금의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동 창암의 처소에 들러 창암을 만났다. 그 뒤 추사는 귀양살이 9년만인 1848년(헌종 14) 12월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창암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세상을 뜬 이듬 해였다. 추사는 그 후손을 찾아 문상하고 묘소에 비문을 남겼다. 그는 78세로 일생을 마치고 완주군 구이면 평촌 하척부락에 묻혔다. 이삼만은 53세에 부인 김해김씨와 사별했는데 슬하에는 딸만 셋이었고 가계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아랫자골 후록 창암의 묘소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묘비가 있었다고 전한다. 묘문음기(墓文陰記)는 비치지 않고 묘표만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비 앞면에는‘名筆蒼巖完山李公三晩之墓’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公筆法冠我東, 老益神化, 名播中國, 弟子數十人, 日常侍習, 亦多薦名于世 取季弟子爲后’(공의 글씨는 우리나라 으뜸으로 노경에 들어 더욱 신묘해져서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제자 수 십 사람이 날마다 모시고 글씨를 배워 세상에 그 이름을 드날린 자 또한 많았다. 막내 동생의 아들로 뒤를 이었다) 그러나 묘문음기(墓文陰記)는 비치지 않고 묘표만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다.

이삼만은 우아한 문장과 법통 있는 글씨를 쓰며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에서 청아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서도는 심오한 사상과 고고한 경지에서 이뤄졌다. 추사 김정희 글씨와 더불어 높은 수준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글씨 쓰는 사람들의 정신과 자세에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몇 년 전 정읍시는 창암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유묵첩(遺墨帖)´을 발간했다. 이 책은 `창암 이삼만 선생의 생애´와 `창암의 서도와 예술 세계´ `유묵첩 발간의 의의와 후속대책´ `연비어약(鳶飛魚躍)´등 86점의 주요 작품 및 해설편으로 구성됐다.

창암의 일대기에는 정읍시 부무실 출생과 성장, 50세 전후 전주 교동 이주, 60대 이후 완주군 상관면 죽림리 공기골에서 78세에 작고한 후 구이면 평촌리에 묻혔다고 밝혔다. 창암은 갈필(葛筆), 죽필(竹筆), 앵우필(鶯羽筆) 등 토착 필기구를 직접 개발하여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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