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손수(大公孫樹)는 옛날 전주시내 구 전주극장 서쪽 모퉁이에 있었던 큰 은행나무를 말한다. 이 나무에 배를 매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 말은 전주천에도 과거 배를 띄우던 시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전주에서도 뱃놀이를 했다는 사실은 문헌에도 나온다. 영조조 관찰사 홍낙인의 패서문루기(沛西門樓記)를 보면“성의 문루에 올라 내다보면 배와 달구지가 서로 함께 나란히 미치는 곳(今從門樓而望焉 山之高也 水之深也 稼穡之豊歉也 謠俗之美惡也 冠蓋之所相接也 舟車之竝臻也)”이라 하여 서문 밖의 풍경에 뱃놀이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서문 밖 기전여자대학과 어은골 사이의 마을 명칭이 배마을(舟洞)이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전주천에 떠 있는 배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오목대 북서쪽 모퉁이의 벼랑에도 급격한 경사면이 있다. 이곳은 옛날 벼랑 밑에 배를 대고 언덕길의 계단을 밟고 오목대에 오른 유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곳 우묵한 곳의 흙더미를 들추면 많은 기와편이 나타난다. 전주천의 원류는 전주의 동남쪽 완주와 임실 두 군의 경계를 나누는 분수령인 슬치의 북동 기슭이다. 완주군 상관면 표고 약 230m의 지점에서 시작하며, 폭은 약 10m에 달한다. 점차 천의 폭과 함께 계곡의 폭이 넓어지면서 북서로 흐른다. 남관의 동쪽을 지나 신리에서 우측 지류인 대흥천과 만난다. 전주시에는 남동쪽 경계에 들어와 한벽당 부근에서 서쪽으로 휘돌아 남천(南川)이 되었다. 왼쪽에서 들어온 반곡천, 남고천과 합한 뒤, 전주교, 매곡교를 지나 서천(西川)이 되었다. 오른쪽으로 돌아 다가산록을 끼고 진로를 북서쪽으로 잡고 진북사에 도달한다. 다시 덕진동의 남쪽에 이르러 서쪽으로 향한다. 팔복동 추천대교 서쪽에서 모악산의 동쪽 기슭을 거처 북쪽으로 흐르는 삼천(三川)과 합류하여 추천(湫川)이 된다. 추천은 진로를 북동쪽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서쪽으로 휘돌아 간다. 동쪽에 광활한 평야를 두르고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소양천과 고산천의 두 하천과 합류하여 만경강으로 흘러 서해로 향한다. 옛 하천의 줄기는 한벽당 아래로부터 이목대 그리고 오목대의 아래를 둘러 서 간다. 지금 기린로와 대략 같이 흘러 곧바로 덕진연못을 거쳐 추천으로 흘러 내려간 시대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1939년 한발 때에 덕진연못의 북서쪽 모퉁이 연못 아래를 지하 10척 정도를 팠을 때 암반이 나타났다. 그 사이에서 많은 냇돌을 파 올렸던 일이 있었다. 이후 덕진연못은 전주천이 서쪽으로 옮겨간 후에 전주 건방(乾方)의 공허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쌍아 올려 부근의 물을 담아 관개(灌漑)를 했다. 실제로 덕진연못과 전군도로와의 사이에 있는 밭은 지하 1미터만 파더라도 하천의 모래층이 나타난다. 완산지에 의하면 옛날 전주를 다스리던 곳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쪽을 향하게 되었다. 또한 남천이 옛날에는 오목대 아래로 흘렀는데 민가를 파보면 왕왕 모두 냇돌이 나오니 옛날에 물이 흐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견훤산성에서 기린봉를 거쳐 문화촌이라 불리는 옛 인봉리를 지나 서노송동 구형무소 자리에 이른 능선 자락 현재 진북동 우성아파트를 있는 능선에 견훤의 고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조선시대와 같은 지역에 성이 수축된 것으로 보여진다. 전주천의 하상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은 고려 이전의 일로 추정된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옛날 선창가(商埠地)가 시가의 주요부가 되었다. 낮은 지대가 발달하여 돌 성벽이 쌓여지면서 치소의 방향이 남향으로 바뀌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전주시가의 가택은 옛날 동으로 산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였다. 당시 전주는 재물은 풍부하지 못하였지만 좋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남향으로 세운 뒤부터는 반대로 바뀌어 재물은 풍부한데 좋은 인재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북쪽이 허하게 되었다. 결국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전주부성의 기맥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건방(乾方, 북쪽)을 막기 위해 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KBS 산 사이에 잡림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호남읍지에 의하면 1509년 6,000척에 달하는 전주천 제방을 수축했다. 1731년에는 전주부윤 이수항이 승군을 동원하여 수축하였으며, 1784년에는 관찰사 조시위가 대규모로 제방을 수축하였다.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개축을 실시하였다. 수차례의 제방 공사가 있었지만 일본에 강점된 즈음 전주 사진을 보면 제방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1920년 대홍수로 13명이 사망하고 546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이후 1932년 완산교에서 상류 쪽으로 339M의 제방을 준공하였고, 1933년에는 전주교 하류 좌우 제방 576M를 시공하여 쌓았다. 1936년 대홍수 때는 4시간 동안 무려 188mm를 퍼붓는 강우로 인해 전주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리도 무너져 버렸다. 1937년 좌우 제방 총연장 8400M를 축조하였으며 다가교 아래에는 보트장을 시설하기도 했다. 전주의 시장은 전주천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남문밖 시장과 서문밖 시장은 조선시대 전주의 대표 시장이었다. 모두 전주천변에 벌려진 장터였다. 전주의 장터는 4개의 성문 밖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다. 남문밖 시장은 2일장으로 생활용품과 곡식을 거래하는 장터가 섰다. 동문밖 시장은 9일장으로 한약재와 특용장물의 장터가, 서문밖 시장은 7일장으로 소금, 깨와 같은 양념과 어물이, 북문밖 시장은 4일장으로 비단같은 포목과 잡곡을 거래하였다. 다리를 중심으로 구별된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정복규 기자) <저작권자 ⓒ 새만금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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