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회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2/24 [00:08]

테헤란 회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2/24 [00:08]
테헤란 회담(Tehran Conference)은 1943년 12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 개최한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의 3거두회담을 말한다. 당시 스탈린은 비행기 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 회담하기를 원했다. 루즈벨트 역시 장애인이라서 장거리 비행을 꺼려했다.
그래서 처칠과 루즈벨트는 장개석과 회담을 진행한 카이로에서 다시한번 회담을 개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고 결국 중간지점으로 중동 지역이 거론되었다. 처음에는 바그다드, 바스라 등이 개최지로 거론되다가 최종적으로 테헤란으로 결론이 난다.
이 회담에서도 전후 한국문제가 거론되었다. 카이로선언 이전부터 미국의 정가와 언론에서는 심심찮게 한반도 국제신탁통치안이 흘러나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을 40년 정도 준비기간(신탁통치)을 주고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 제안에 동의했다.
카이로회담에서는“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 한국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는 문안이 나온다. 적당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구절은 미국이 제기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연합국들 사이에 정치적으로 조율되어 나온 표현이었다.
그 뒤 태평양전쟁위원회(pacific war council)의 1944년 1월 12일 회의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은“한국인들은 아직 독립된 정부를 운영하고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그들은 40년의 후원 하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스탈린이 동의했다고 보고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서양헌장 발표 이후 간헐적으로 전후 식민지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내비쳤다. 루즈벨트는 1943년 3월 영국 외상 이든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에 국제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제기함으로써 이 문제를 최초로 공식 거론하였다.
1942년에서 1943년 중반에 이르는 기간 중에 미국은 한국의 전후처리에 관한 일반적 원칙과 세부적 문제점들에 관한 검토를 일단락 지었다. 한국문제를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에서 제기하여 다른 참여국들의 동의를 얻어내려고 하였다.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담을 위한 준비 모임에서“신탁통치안의 가능성을 매우 강조하고 이를 모든 종류의 상황에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 안보의 관점에서 세계의 많은 부분을 국제신탁 하에 두어야 한다”는 점과“여러 가지 상이한 신탁통치안을 식민지역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미국은 초기 구상단계에서는 신탁통치안을 식민종속지역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킬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한편 테헤란 회담으로 연합국 측의 전쟁 협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전쟁 처리와 전후 문제가 연합국 측의 과제로 되어 9회에 이르는 연합국 회의가 열렸다. 1943년 10월에 미국·영국·소련의 회의가 모스크바에서 열렸고, 이어서 같은 해 12월에 테헤란 회담으로 진전하였다.
그 결과 3국의 협력과 전쟁수행 선언, 동부전선에서 소련의 반격에 호응한 제2전선의 결성 등이 약속되었다. 이 회담에서 처칠은 "영국은 폴란드가 독립 국가로서 복원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
스탈린은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과 1940년의 러시아-핀란드 조약에 의해 소련이 획득한 지역을 전후에도 계속 보유해야 한다는 희망을 거듭 피력했다. 또한 발트 해 연안의 동프로이센도 소련의 영토에 추가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독일에 대해서는 그 해결을 놓고 오랫동안 논의가 벌어졌다. 그러나 3명의 연합국 수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았다. 전후의 국제조직 문제에 대해서도 정확한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서방 연합국과 소련의 생각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루즈벨트는 카이로회담 이전에 영국과 소련을 설복하여 중국의 참여를 보장받으려고 했다. 당시만 해도 2등국가였던 중국을 강대국 회의에 참여시킴으로써 중국 중시정책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4대국을 한 자리에 모으려는 루즈벨트의 기도는 실패하였다. 결국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은 3개국 회담으로 성사되었다.
 회담 초기 단계에서는 선결과제였던 대독일 전쟁이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각국 정상들은 '각국이 협력하여 최후(즉 독일이 항복하거나 독일을 점령할 때까지)까지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한다.'라는 대명제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를 이루었다.
회담장을 장악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유럽대륙에서 2년 넘게 독일군 주력을 상대한 것은 소련군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스탈린의 발언권이 강했다.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 이후 전세가 완전히 소련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역전되었다. 루즈벨트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처칠도 스탈린과 협상을 해보려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소련이 영국한테 아쉬울 게 없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독일의 전쟁도발을 영원히 억제하기 위한 일환으로 고위직부터 말단직까지 포함해서 십만명의 독일군 장교를 처형할 것을 제안했다. 루즈벨트는 이 발언을 농담으로 받아 '그건 너무 많고 4만9천명 정도만 죽이죠'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처칠은 일찌감치 각종 정보원을 통하여 대숙청, 카틴 학살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처칠은 스탈린의 발언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는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독일 측에서는 테헤란 회담에 모인 연합국 정상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다. 이 계획을 세운 사람은 바로 연금 상태에 놓인 무솔리니를 탈출시켜서 전 유럽에 악명을 떨친 오토 슈코르체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립단계에서 취소됐다.
미국은 종전 후에도 대영제국을 유지하려 했던 처칠의 야망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종전 후 소련이 동유럽 일대에 자신의 세력권을 다져놓을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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