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3상회의 오보(誤報) 사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4/07 [00:18]

모스크바 3상회의 오보(誤報) 사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4/07 [00:18]


모스크바 3상회의는 1945년 12월 16일~25일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의 3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소집한 외상회의를 말한다.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4개국 대표에 의한 신탁통치를 기본 취지로 하는 미국 측의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 취지로 하는 소련 측의 수정안이 토론되었다.
이 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결국 의견을 조율하여 같은 해 12월 27일 합의문으로 네 개의 조로 이루어진 '미ㆍ영ㆍ소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서 세 번째 조인 "한국"에 관한 문단은 네 개 항으로 이루어졌다. 속칭〈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 >이다.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보고서에서 세 나라는 한반도의 정부 수립에 대해 발표하였다. 이 중 세 번째 항은 신탁통치 안을 담고 있다. 모스크바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을 선결 과제로 제시하였지만, 미국의 신탁통치 제안도 받아들인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신탁통치란 국제연합의 감독 하에 어떤 국가가 자체적으로 통치 능력을 갖출 때까지 다른 국가가 대신 통치해주는 제도를 뜻한다. 한국사에서 의미가 매우 깊은 용어다. 한편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창이던 때 한반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동아일보의 기사 하나가 나온다.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그 기사의 제목은“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삼팔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이었다. 이 기사는 명백한 오보였다. 이는 소련이 1946년 1월 24일 타스통신을 통하여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경과와 신탁통치 안의 원래 제안자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오보임이 밝혀졌다.
신탁통치는 미국이 만든 개념이다. 그리고 미국의 루스벨트는 얄타회담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 기간을 40~50년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오히려 스탈린은 통치 주체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두고 신탁통치 기간을 5년까지 줄이자고 주장했다. 물론 스탈린은 다른 계산이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개입을 배제하는 편이 한반도 공산화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이 기사가 나온 12월 27일은 모스크바 3상회의의 공식발표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직 끝나지도 않은 회의의 내용을 동아일보는 공식 결과라면서 내보냈다.
사실 기사 내용도 잘 보면‘관측이 농후하여 가고 있다’‘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는 불명하나’등 추측성 내용이 나온다. 제목만 자극적인 기사였던 것이다. 공식 발표가 나오지 않은 시점인 만큼 동아일보 기자가 취재를 잘못했을 가능성은 없다. 오보의 시작이 문제였다.
확증은 없다. 그러나 미군정이 그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미군정은 남한 내에서 보도되는 기사들을 철저히 검열했다. 그렇다면 이 오보를 일부러 알면서도 최소한 용인한 것이 분명하다. 미군정을 배후로 본다면 그 목적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민족 감정상 한국인들은 그 기간이나 성격이 어떻든 간에 타국의 지배를 받는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탁통치가 소련의 의도인 것처럼 꾸며 소련의 지지도를 흔들려는 생각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우익 세력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반탁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까지 친일청산을 기본 목표로 잡고 가던 해방 정국은 순식간에 반공(反共)과 반소(反蘇) 운동으로 그 틀이 뒤바뀌게 된다. 입장이 서로 달랐던 김구와 이승만 역시 한 목소리로 반탁을 외쳤다.
한편 남한 내 좌익계열 단체는 고민에 빠진다. 동아일보 기사 내용에 따르면 자신들과 같은 좌파는 제2의 식민통치를 지지하는 반민족 세력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좌익단체는‘신탁통치는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등과 같은 표어를 내세우며 반탁운동에 나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좌익, 특히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남로당 세력은‘모스크바 3상회의’내용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사실상 찬탁으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남한 내 좌익계열의 찬탁 운동은 소련의 사주를 받은 결과라는 관점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실제 당시 우익계열 인사들도 이것을 빌미로 상대방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련은 1월 24일에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주장하지 않았음을 천명했다. 남한 내 좌파도 동아일보의 오보에 낚인 셈이다.
신탁통치 오보 사건으로 인한 한반도의 좌우 갈등은 남한을 극심한 혼란 상황으로 밀어 넣었다. 동아일보 사주인 송진우는 동아일보의 오보를 인정했다. 신탁통치의 진실을 알았기 때문에 극렬한 반탁운동을 거부하는 신중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뒤 반탁세력에게 암살당한다.
다른 신중론자들도 찬탁 세력이라고 매도당하기 일쑤였다. 합리적인 판단이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이 격화된 것이다. 이때 김동인, 김창룡, 노덕술과 같은 친일파 출신들은 자신들을 반공투사로 포장하며 애국자 행세를 한 일도 있다.
그 뒤 신탁통치는 한반도 내에서 진행되지 않았다. 대신 남한과 북한에 각각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들어선다. 실질적으로 신탁통치보다 더한 외국의 간섭이 시작된 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단이었다. 물론 신탁통치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해서 분단이 없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도 없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은 그 때나 지금이나 모두 중요하다. 특히 당시 냉전 구도에서는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한반도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없었다면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는 시각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을 것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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