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4/14 [06:56]

여운형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4/14 [06:56]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는 8․15 해방 이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처음으로 조직한 정치 단체다. 해방 직후 과도기의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는 것 등을 목표로 활동하며 세력을 형성했으나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해체되었다. 약칭‘건준(建準)’이라고 한다.
건준은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일본으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일본은 패망 직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했던 엔도 류사쿠가 송진우에게 치안권과 행정권 인수를 제의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였던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여운형을 만난다. 그리고 치안권과 행정권 등 모든 권한을 여운형에게 이양하고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날 밤 여운형은 자신이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에 결성했던 지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다.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독립운동가들을 석방시키고 건준위로 편입시켰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발족한 지 이틀이 지나면서 체계적인 조직망을 갖추면서 확대 개편해 나간다. 건준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
건준은 광복 이후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후에 건준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바뀌면서 지부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8월 말까지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에 부응하여 전국적으로 140여개의 지부가 확장되어 설립되었다.
북한 지역에서 주도한 지도자는 고당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은 평양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도 '비폭력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한'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여운형과 조만식이 동시에 건국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김성수, 송진우 등 국내의 우익세력들은 '중경 임정 지지'를 선언하여 건준에 불참하였다. 1945년 9월 4일 건준 전체회의가 열려 부위원장에 좌파 변호사 허헌을 세우는 등 집행위원 개편이 되었다. 여기서 박헌영의 공산당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 주도해 나아감에 따라 건준의 본질적인 중도적 정치노선 성향은 변질되어갔다.
9월 6일 밤에 경기여고 강당에서 약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했다. 인공 형태로 개편시킨 것이다. 이후 '인공'은 박헌영을 주축으로 실권을 장악한다.
이어 9월에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면서 미군정의 직접 통치를 발표하는 '맥아더 포고령 1호'가 발표된다. 치안, 행정 업무를 담당했던 '건준'과 '인공'은 불인정되었다. 심지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불인정되었다. 그 이후 38선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시작된다.
한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1886-1947)은 광복 당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지도자였다. 영어회화에도 능통했고 웅변술에 뛰어났다. 잘 생긴데다가 세련된 멋쟁이였고 기지와 제스처도 능란했다. 이화여자전문대학 학생인 이태영(李兌榮)이 웅변대회에서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는 당찬 여학생이나 아버지가 없음을 알고 양녀로 삼기도 했다.
그는 경기도 양평 신원리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부잣집 양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0대 중반에 한문수업을 중단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소년이 되었다. 21세에 아버지가 죽어 상속을 받았는데, 맨 먼저 빚 받을 문서와 노비관계의 서류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종들을 모두 불러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의 형제요 자매들이다”라고 외치고 각기 살길을 마련해 주었다. 혼인하지 않은 종들은 짝을 맺어 주었다.
1914년 그는 활동무대를 국외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상해로 갔다.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 영문과에서 서양학문을 익히고 미국인 서점인 협화서국(協和書局)에 근무하면서 영어회화를 배웠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중경의 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연계를 모색하는 등 지하운동을 펼쳐 나갔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된 뒤 신사참배니 국방헌금이니 징병 권유니 따위 강요를 일체 거절한다.
1947년 5월, 좌우합작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의 성사를 지원하던 중 여운형은 극우청년 암살자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암살자의 배후로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게 떠돌았다. 미국이 사주했다고도 하고 이승만을 따르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있다고도 했다. 김두한 등 우익청년들도 거론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배후가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45년 11월 어느 여론조사에 따르면“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 지도자” 항목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김일성 9%, 김규식 5%의 순서로 매겨졌다.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집안은 심한 고통을 당했으며 취직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딸 여연구(呂燕九)는 해방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녔는데 늘 미 군정청 경찰의 감시가 따랐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1946년 여운형은 북쪽에 갈 때 딸을 데리고 가서 북쪽에서 살게 했다. 동생인 여운홍의 정치활동도 늘 견제를 당했다. 그의 추종세력인 건준 또는 인민위원회 또는 근로인민당 당원들은 끊임없이 감시와 압박을 받았다. 이제는 몽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전기와 전집, 연구서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묘소는 현재 서울 성북구 우이동 수유리 서라벌 중학교 근처에 있다. 북한강 가에 있는 강변마을 신원리에 있는 그의 생가는 모두 무너져 없어지고 작은 건물 하나만 겨우 버티고 서 있다. 뜻있는 인사들이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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