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산 오보 사건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4/25 [00:11]

만보산 오보 사건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4/25 [00:11]


만보산(萬寶山) 사건은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吉林省.지린성) 장춘현(長春縣)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 사건이다. 당시 조선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일본인 대지주가 늘어났다. 반면 조선의 많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생활은 극도로 비참했다.
결국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27년 56만 명 정도이던 만주의 이민수는 1936년 89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만보산(완바오산)은 지린 성 창춘(長春)에서 서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31년 4월 창춘 와세다 공사(早稻田公司)의 경리 하오융더가 완바오 산 지역의 미개간지 약 3㏊를 조선농민 8명과 10년 기한으로 조차계약을 맺어 개간했다.
이때 조선농민 180여 명을 동원해 수로공사를 진행하자 부근에 거주하고 있던 토착 중국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문제로 양국 농민 간에 감정적 대립이 생겼다. 중국농민 약 500여 명은 7월 1일 농기구를 가지고 모여 용수로를 막은 제방을 파괴했다.
다음날 중국인 농민과 중국 경관 300명이 다시 모였으나 우리 농민들은 일본의 무력만 믿고 수로복구와 제방공사를 계속 진행시켜 7월 11일 물길이 통하게 되었다. 일본 관헌의 이러한 행위는 진심으로 우리 농민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음흉한 속셈을 지닌 계획적 행동이었다. 7월 1일과 2일의 충돌에서 조선농민은 사상자가 없었으며, 중국농민에게서만 약간의 부상자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특무기관에 조작기사를 제공해〈경성일보〉에 사건을 대대적으로 확대 보도하게 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반(反)중국적 감정이 유발되었다. 인천·평양·서울 등지에서 수천 명의 한국인이 중국인을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보도과정에서 동아일보의 장덕준(張德俊) 특파원이 일본관헌에게 피살, 행방불명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건을 과장 보도함으로써 한·중 양국민 사이에 강렬한 반감이 생겼다. 조선에서는 한인에 의한 화교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배일운동을 재발시키게 되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반(反)중국인 감정으로 쏠리게 했다. 한·중 양국민의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한·중 사이의 민족감정을 자극해 두 민족을 분열시키고,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1931년 7월2일 밤과 3일 새벽에 < 조선일보 >는 두 차례나 호외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호외는 오보였다. 오보도 단순한 오보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 침략의 길을 닦으려는 목적으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공한 허위 정보에 속아 넘어간 오보였다. 호외의 여파는 의외로 컸다. 호외가 뿌려진 직후인 7월 3일 새벽부터 인천에서 중국인 가옥과 상점에 대한 투석이 시작되는 등 전 조선에서 반중국인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1931년 7월 3일부터 9일 사이에 조선에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은 전국에서 대부분 불에 타고 파괴되었다. 목숨도 앗아갔다. 대대적인 반중국인 폭동이었다. 만보산 폭동은 일제 계략에 빠져 화교를 학살한 사건이다. 폭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서울 서소문의 중국인 거리에는 5천여 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중국인 상점의 물품을 파괴하고 중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구타했다. 400여회 이상의 습격사건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재일 조선인들이 일본 내의 중국인들을 습격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당시 중국인들은 도시 뿐 아니라 농촌의 중심지에서도 음식점이나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피해는 엄청났다. 사망자는 100여명이 넘었다. 1930년 말 화교의 총인구는 6만9천여 명이었으나 1933년 말에는 3만7천여 명으로 급감했다.
폭동 두 달 뒤인 1931년 9월18일, 일제는 만주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강행하여 만주를 점령했다. 만주 침략의 음모를 꾸미던 일제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펴는 것을 두려워했다. 조선에서의 반중국인 폭동이 재만 조선인들에 대한 보복을 불러 오면 이를 기화로 군대를 출동시킬 명분을 쌓을 것으로 보았다. 반중국인 유혈 참극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이용당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해방 전 우리나라 화교의 인구는 최대 10만에 달했다. 그러나 지금 그 수는 2만여 명에 불과하다. 1931년의 폭동에도 살아남은 화교들은 1970년대 중반 이래 이 땅을 떠나고 있다.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 화교자본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 화교 수가 계속 줄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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