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통치와 반탁운동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4/28 [00:13]

신탁통치와 반탁운동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4/28 [00:13]
제2차 대전 당시 한반도 문제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으로 구체화됐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미성숙한 민족에 대해서는 성급하게 독립시킬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신탁통치 안이 결정된 것은 영국과 미국이 한국의 독립 능력을 저(低)평가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다.
이러한 굴욕적인 신탁통치안에 대해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우파들은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은 처음에 반탁운동에 동참했으나 정치 공작을 통해 한반도의 적화를 노린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에 찬성으로 돌아선다.
이에 앞서 연합국은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놓여 있던 조선의 해방을 주장했다. 포츠담선언에서도 그 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나 일정 기간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는 세계의 최대의 식민지 제국이었던 영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영국은 당시 인도를 식민통치하고 있었다.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도 같은 입장이었다. 소련이나 중국도 국가의 분열이 야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으면서 세계대전 발발 전에 필리핀의 독립을 결정한 미국만이 연합국 중에서 입장이 달랐다.
1946년 3월 서울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미국은 신탁정치 체제에 모든 정당과 단체의 회의 참가를 주장했다. 반면 소련은 미국과 3국 외상회의의 결정을 수용하는 정당과 단체만을 참가시켜야 한다고 했다. 양측이 격렬히 대립함으로써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회의가 결렬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 사이의 미소 공동위원회의는 처음부터 협력의 여지가 적었다. 미소 공동위원회의가 다시 1947년 5월에 열렸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를 포기하고 한반도 문제를 UN에 넘겼다.
"한반도를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통치하에 둔다"는 신탁통치안을 두고 좌·우익의 대립은 극심했다. 김구와 임시정부계는 반탁과 즉각 독립을 요구하며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탁운동은 국민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한편 좌익세력은 처음에는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표명했으나 1946년 1월 2일 태도를 바꾸어 찬성 의사를 표명했다.
처음에 반탁운동은 우익과 민족진영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차츰 남한 단독정부 수립문제를 둘러싸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과 김구의 단독정부 불가·통일정부 노선으로 갈라졌다. 한편 조선 공산당 책임비서인 박헌영은 3상 회의 직후 38선을 넘었다. 그리고 김일성과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모스크바에 갔다가 돌아온 민정담당 부사령관 로마넨코와 서울총영사 폴리얀스키가 참석한 북조선 공산당 집행위원회에도 참석했다. 박헌영은 서울의 반탁 주장이 거세다고 보고했지만, 소련의 지침은 찬탁이었다.
북한의 세력은 통합되어 있으니 남한의 좌익 세력을 합치면 남한의 나머지 세력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더라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만 임시정부의 구성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면 공산당 계열이 수적인 우위에 놓인다는 것이 소련의 지시였다.
이와는 달리 우익과 중도 계열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들은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에 모였다. 김구와 임정 세력은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이를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정국을 주도하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다.
미군정의 하지는 송진우 등을 불러 신탁통치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니 격렬한 반대를 자제하도록 부탁했다. 송진우는 김구, 이승만의 강력한 반탁운동에 비판적이었다. 송진우는 미국을 적으로 돌리면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얻는다는 생각에서 김구와 맞섰다.
송진우는 1945년 12월 29일 저녁 10시부터 경교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과 우파 회의에서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임시정부가 여론을 몰아 미군정을 접수하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방향으로 논의를 끌고 가는 것은 무모한 시도라고 판단해 냉정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 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 간에 전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 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송진우는 결국 이 발언을 한 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현직 경찰관 한현우 등 6명이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그 배후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구의 임정(한독당) 계열에서 송진우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임정 노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볼 때 송진우의 발언은 자신들의 '제2의 독립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판단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포고령을 내려 전국민 파업을 지시했다. 반탁시위를 조직하고 전국적인 파업이 계속되는 가운데 임정은 국자(國字) 제1호를 발표, 미군정에 정권 이양을 요구하고 정부를 접수하려 했다. 그러나 임정의 무모한 쿠데타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후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에서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초기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나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과문을 입수한 김규식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다. 이후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암살단이 조직되었다. '신탁통치는 식민통치의 한 방식이며, 이를 찬성하는 자는 반역자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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