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누구인가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7/05/11 [00:23]

문재인은 누구인가

새만금일보 | 입력 : 2017/05/11 [00:23]


문재인(文在寅)은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에서 아버지 문용형과 어머니 강한옥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용형은 함경남도 흥남의 남평문씨 집성촌인 솔안마을 출신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흥남시청에서 농업과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12월 23일에 흥남 철수 작전 무렵에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가족과 함께 몸을 싣고 남쪽으로 피난해 내려왔다.
부산으로 이사하여 남항초, 경남중, 경남고를 졸업했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말기에는 극도로 가난한 자신의 처지에 낙망, 술·담배에도 손을 대며 방황을 하다 결국 대학 입시에 실패하였다.
졸업 후 1971년 종로학원 진입 시험에서도 일등을 하며 학원비를 면제받고 재수를 시작했다. 이후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전두환 정권에 항거하다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청량리구치소에 수감 중, 경희대 조영식 총장의 신원보증으로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한편 문재인은 남평문씨(南平文氏) 후손이다. 남평문씨의 시조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 때 공을 세워 남평백에 봉해졌다. 그러나 1세조는 고려 숙종 때 서북면지병마사를 지내고 역시 남평군에 봉해진 문익(文翼)이다.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시조가 남평백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남평은 전남 나주시 남평읍의 지명이다. 전남 나주군 남평면에 장자지라는 연못과 6미터쯤 되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호남쪽에서는 전남 영암군 영암읍 장암리, 전북 김제시 공덕면, 전북 군산시(전 옥구군), 전남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 전남 여수시 화양면 이천리, 전남 광양시 옥곡면 원월리, 전남 영광군 홍농읍 진덕리에 후손들이 많다.
남평문씨 가운데 고려 무인시대의 인물 중에 주목할 만한 인물로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이 있다. 그는 남평문씨로서 자는 덕병(德柄)이요,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고려 인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문공유(文公裕)의 아들로서 큰아버지 문공인(文公仁)의 음보로 판관이 되었다. 음보는 과거가 아닌 고관대작의 추천에 의한 벼슬이다. 그는 의종 때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 종6품)이 되었다.
문극겸은 성격이 강직하여 고려 의종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고려 의종 무인의 난(1170 경인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어느 날 환관 백선연(白善淵)이 풍류를 좋아하는 의종을 꼬아 예성강에서 뱃놀이를 하기 위해 궁을 나설 때였다. 정언 벼슬의 문극겸이 나서 의종의 어가를 막고 충언으로 간(諫)했다.
"마마. 이제 황음을 중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왕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주변 환관들을 탄핵했다. 백선연은 왕의 총희 무비(無比)와도 놀아나며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던 환관세력의 대표자였다.
"환관 백선연을 지금 목 베지 않으면 후일 크게 후회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의 말보다는 백선연의 말을 들었다. 결국 화를 입은 문극겸은 실의 속에 개경을 떠난다. 그가 개경을 떠나 집에 돌아와 지은 한시가 동국여지승람 공주목 유구역편에 전해온다.
유구역은 지금의 공주시 유구읍이다. 공주는 문극겸의 고향이다. 그는 삭직되어 일시 야인으로 돌아왔다가 나중 황주판관으로 복귀한다.
공주시 유구읍 추계리에는 문극겸의 묘와 사당이 있고, 문극겸이 고향에 은퇴해 있을 때 후학을 지도하던 고간원터가 남아 있다.
그가 충언을 한 직후인 1170년 경인년 봄에 보현원에서 무신들의 난이 일어난다. 상장군 정중부(해주정씨.상장군은 대장급 벼슬), 견룡행수 이의방(전주이씨.견룡행수는 오늘의 경호실 대령급 벼슬), 산원 이고(산원은 하사관급 벼슬), 이의민(경주이씨.천민출신) 등이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니 왕은 비로소 문극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문극겸은 정중부의 난 때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좌정언 때 직언한 일로 화를 면했다. 그는 1171년(명종 1) 우승선어사중승(右承宣御史中丞)으로 있을 때 많은 문신들을 화에서 구하고, 무신들에게는 고사(故事)의 자문에 응했다. 그는 또 용호대장군과 상장군을 겸임, 문무(文武) 겸직의 시초가 되었다.
문극겸은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이린(李隣)에게 출가시켰다. 이 때문에 계사의 난에 일족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이린은 바로 이성계의 6대조가 된다. 문극겸은 명종 4년 이의방이 피살된 후에도 계속 관직에 남아 벼슬을 지냈다.
(정복규 기자)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새만금광장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