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속의 고독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0/02/04 [05:23]

군중속의 고독

새만금일보 | 입력 : 2010/02/04 [05:23]

 

 

 

평화로운 일상에 어느 날, 우체부 아저씨가 잠겨있는 문을 노크하더니 카드 전보 한 장을 던지고 갔다.

내용은 느닷없는 어머니의 사망 부음소식이었다. 그런데, 태산이 무너지는 슬픔이 있어야할 그의 가슴은 호수 같이 조용했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야할 눈물, 땅을 치고 통곡에 젖어 있어야할 그는 무덤덤했다. 길가에 죽음으로 누어있는 똥개를 보듯 아무 생각 없이 장례를 치렀다. 오히려 눈감은 어머니가 이제부터는 저 조용한 북망산에 가서 조용히 쉬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는 그런 기분으로 가볍게 장례를 치르고 외출을 한다. 널려있는 자갈돌을 걷어차면서 길을 걷고 있을 때 ‘마리’라는 애인을 우연히 만난다. 애인은 다른 사람처럼 죽고 못 사는 그런 처지가 되는 편은 아니었다.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처지의 사이였으나 하룻밤의 몸을 섞게 된다. 그를 지켜보던 누군가에서 ‘그 여인을 사랑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는 ‘사랑은 모르겠고 섹스는 하고 싶다’고 엉뚱한 말로 대답을 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오다가다가 건달 친구를 사귀게 된다. 멋없는 일상에서 탈출코자하는 욕구가 그를 방황의 늪으로 몰아넣는가 싶더니만 급기야 어느 해변에서 돌발적인 사고를 친다.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다. 졸지에 살인자가 된 그가 재판장에 선다. 재판관이 물었다.

“왜, 죽였는가?”

대답은 간단했다.

“대낮에 사정없이 내려 쪼이는 태양으로 눈이 가물거려서 그랬다.”

재판장과 청중은 ‘싱거운 놈!’하고 웃었다. 변호에 나섰던 사람들도 그의 실없는 진술에 돌을 던졌다. 허나, 그는 태연했다. 자신으로서는 그 일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읽었던 기억의 줄거리의 대강이다.

이작품의 중심 가치는 자기 실존, 자기 쾌락, 자기편리 외에는 모든 일상생활에 ‘무감각 ’ ‘무관심’하게 될 미지의 세계 출현을 예고한데 있다.
요즘사회가 그 소설의 예언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때 우리 사회에 들불처럼 번지는 용어가 ‘ 내가 알 게 뭐야’였다. 내 일이 아니면 알 것이 없다는 극한 적 말투다. 남과 이웃이 서로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의식이 침체되고 나만을 생각하는 무관심이 사회를 잡아는 단면이다.


이러한 독단적 생각을부추기는 것을 어느 사회학자는 ‘아파트’문화를 들고 있다. 밀폐 된 시멘트 성벽의 생활의 공간이 공동체의식을 잠식해버렸다는 것이다. 옆집에서 일어난 일을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소위 동고동락의 의식이 땅바닥이다. 콩 한 조각도 나누어먹는다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던 것은 어느 곳에서도 없어 보인다.


21세기는 ‘문화세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 영향 탓인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다. 그 공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대회’라는 명분으로 많은 군중의 모임의 행사가 치러진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은 ‘외롭다’한다. 다시 말하면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는 시대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작품 마르케서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글에서 ‘고독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향한 의식(갈망. 목표) 때문에 주어진다.’ 라고 갈파했다. 갖고 싶은 욕심의 집착 때문에 고독을 느끼게 된다고 부언하고 있다.


아이티라는 나라의 재앙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여기저기서 구호의 손길이 가히 경쟁적이다. 우리나라의 참여행렬이 현장에서 뛰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현대인이 함께 앓고 있는 ‘군중속의 고독’을 벗어나기 위한 인간세상의 뒤늦은 자각증상이지도 모른다. 이를 계기로 이 시대 사람들의 무관심의 중증이 살아져갔으면 좋겠다.

 


 

/양 규 태 <수 필 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