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합니다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2/13 [06:44]

나는 행복합니다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2/13 [06:44]

“ ♩♬♪♫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행복합니다. ♩♬♪♫ (이하 생략)”

 옛날 윤항기가 불렀던 이 노래를 흥얼거리면 절로 신바람이 난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기름값이 치솟으며, 달러 가치가 떨어져도 나는 즐거이 이 노래를 읊조린다. 그러면 내 안에 즐거움과 기쁨이 차오르고 내 몸속에서 엔돌핀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오른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삼계리 탑전(塔田)마을. 박사고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지금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백 명이 넘지만 내가 살던 그때는 면소재지이면서도 버스조차 다니지 않던 궁벽한 산골이었다. 그런 곳에서 자란 내가 지금은 버스와 택시는 물론 기차와 KTX, 지하철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심지어는 비행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자가용 승용차를 굴리며 살고 있으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의 몸채는 네 칸 기와집이었고, 사랑채와 행랑채, 헛간 등이 옹기종기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 우리 집이 윗마을에서는 유일한 기와집이었다. 또 울 안팎에는 배나무, 감나무, 은행나무, 앵두나무, 매실나무, 추자나무, 석류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등 다양한 과일나무들이 있어서 과수원이 부럽지 않게 언제나 푸짐한 과일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도시의 18층짜리 고층 아파트에서 산다. 비록 과일나무는 없지만 아파트 단지 안에는 마트와 과일가게가 있으니 돈 몇 푼만 건네주면 언제라도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다. 전국 방방곡곡의 국산과일은 물론 심지어는 외국과일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그러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살던 시골집에는 전화기와 라디오도 없었다. 전화기는 우리 동네에 한 대도 없었고, 라디오는 겨우 이장네 집에 한 대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집에는 방마다 전화기가 있고 식구들은 저마다 휴대전화기를 갖고 산다. 라디오도 없던 우리 집에는 세계로 열린 창이라는 텔레비전이 두 대나 있어서 나라 안팎의 소식을 손금 보듯 꿰며 살고 있다. 어디 그뿐이던가? 집에 컴퓨터가 있어서 미국으로 유학 간 둘째아들내외와도 날마다 메일을 주고받고 때때로 화상통화도 한다. 비행기를 타더라도 15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인데 바로 옆방에 사는 듯하다. 그러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시골에 살 때는 여름에 수박이나 참외를 깊은 우물 속에 담가두었다가 꺼내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냉장고가 있어서 그런 수고를 덜 수가 있다. 또 더위를 식히려면 팔이 아프게 부채질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선풍기는 물론이고 에어컨이라는 게 있어서 더위 따위는 걱정도 하지 않는다. 겨울도 여름이나 다를 바 없다. 난방시설이 빈약하여 겨울철 밖에서 돌아오면 방안의 화롯불에 언 손을 녹이거나 따뜻한 아랫목을 찾아야 했지만 지금은 아파트에 들어서기만 하면 언제나 훈훈하다. 전기난로나 난방기 때문에 추운 줄을 모른다. 아무리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더라도 내복차림으로 살 수 있는 게 요즘의 아파트생활이다. 그러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중∙고등학교 학생이던 시절에는 펜으로 유리 병 속의 잉크를 찍어서 글씨를 썼고, 학교에 갈 때면 책가방 속에 그 잉크병을 넣어가지고 다녀야 했었다. 그러다 실수로 잉크를 엎질러서 노트와 책, 심지어는 교복까지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몽불랑이나 파일럿트 같은 명품 만년필보다도 오히려 볼펜이나 사인펜을 즐겨 사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필기도구들이 책상 서랍이나 연필꽂이에 즐비하게 꽂혀 있으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나의 학창시절엔 읽을거리가 참으로 귀했었다. 내 고향이 시골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어쩌다 읽을거리를 한 권 구하면 첫 장부터 끝까지 밤새워가며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자고나면 책이 배달된다. 우편배달부들에게 괜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수천 권의 책을 전주와 임실 등 두 군데의 공공도서관과 세 군데의 학교도서관에 기증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이사를 하려면 그 책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시간이 모자라 읽지도 못한 채 쌓아둔 책이 서재의 벽을 다 메울 정도다. 읽을거리가 모자라 목말랐던 내가 지금은 책 부자가 되었으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시골에 살 때는 여름에는 삼베옷을, 겨울에는 무명옷을 입었다. 내가 양복을 처음 입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6.25 전쟁이 일어난 해였다. 막내 이모 결혼식에 데리고 가려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헌 양복을 줄여서 고쳐주셨다. 그 옷에 이름표까지 붙이고 으스대며 외가에 갔었다. 그런데 결혼식 전날 밤, 외가에는 지리산 빨치산들이 들이닥쳤다. 잔치음식들은 모두 그들 차지였고, 심지어는 벗어둔 내 양복 웃옷까지도 가져가 버렸다. 빨치산 중에 나 같은 어린아이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철따라 바꿔 입을 옷이 장롱 속에 즐비하다. 이사를 하면서 아내의 성화에 못 견뎌 헌옷을 많이 기증했지만 아직도 농문을 열면 옷들이 서로 오늘은 자기를 데리고 외출해 달라며 온갖 아양을 다 떤다. 그러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고향에 살 때에는 해마다 흉년이 되풀이되곤 했었다. 여간해서 쌀을 구경할 수 없었고 보리밥만 먹을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끼니때는 어찌 그리도 자주 돌아오고, 밥상을 챙기면 기다렸다는 듯 거지들이 찾아와 깡통을 내밀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의 밥이 그들에게 건네지고 어머니는 상추에 된장만 싸서 공복을 채우셨다. 그때에 비기면 지금 나는 살이 쪘다고 일부러 식사량을 줄이고 가급적 고기를 외면하려고 할 정도이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는 이유가 또 있다. 우리 집은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80대 후반에 돌아가셨고,  어머니 역시 89세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서른한 살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6.25 때문에 50대 후반에 돌아가셨다. 두 분 모두 천수를 누리지 못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내 나이가 어느덧 70대 중반을 넘었다.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나는 우리 집안 남자들의 장수기록을 깨뜨리는 셈이다. 그러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밖에도 이유는 또 있다. 지금은 직장에서 물러난 뒤 하릴없이 무료한 노후를 보내는 이들이 많은 세상이다. 우리 주변은 지금 늙은 백수들의 천국으로 변했다. 그런데 나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을 사랑하는 이들을 모아 함께 수필공부를 하며 즐겁게 살고 있다. 해가 갈수록 그들 중 문단에 얼굴을 내미는 이들이 불어나고, 수필집을 펴내는 이들이 늘며, 좋은 작품을 빚어 외부에서 큰상을 받아오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이러니 어찌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랴.
 사실 행복과 불행은 이웃사촌이나 다를 바 없다. 나보다 나은 위쪽을 바라보고 남과 비교하면 나는 늘 불행하고, 나보다 좀 모자란 아래쪽과 나를 비교하면 나는 늘 행복하기 마련이다.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부터 혼자 흥얼거리던 ‘나는 행복합니다.’란 노래를 나의 애창곡으로 승격시켜서 어느 자리에서나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선뜻 그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 그리고 이 노래에 담긴 행복 바이러스를 내 둘레의 이웃 사람들에게까지 전염시키고 싶다. 그들이 이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홀로 또는 여럿이서 이 노래를 부른다면 이 삼천리금수강산이 그야말로 행복의 꽃동네가 되지 않을까?

“♩♫♪♬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정말 행복합니다. ♩♬♪♫ (이하 생략)”

/김학<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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