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곡 혹은 쑥대머리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2/27 [08:51]

진혼곡 혹은 쑥대머리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2/27 [08:51]

  판소리 동호회 두루회 회원이었던 이 상재 선생이 세상을 떴다.
그의 부음을 들은 건 바람이 몹시 부는 토요일 오후였다. 향년 61세였다.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였다. 암수술 후 완쾌되어 새 세상을 만났다고 격한 어조로 새로운 삶을 예찬했었다. 찬 맥주를 마시며 특유의 유머로 좌중을 압도했던 일이 며칠 전 일처럼 선명해 허망했다. 백세를 산다는 세상에서 살아서 누린 시간이 60년 남짓이라고 생각하니 백세란 말이 현실감 없이 떠다녔다. 저녁시간까지 내내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건장하고 유쾌하던 사람이 한순간 다시는 볼 수 없는 먼데로 갔다고 생각하자 그 먼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돼 아득했다. 어떻게 해도 그의 이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음은 이해하는 게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 인지도 모른다.
 
  난 조문을 잠시 미뤘다. 애통한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가고 싶었지만 그가 없는 곳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무거운 몸을 끌고 집에 오니 딸이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차갑게 죽은 사람도 있는데 고기라니. 처음엔 불쾌하고 싫더니 고소한 듯 기름진 냄새를 맡다보니 뭔가를 마구 씹고 싶었다. 그건 혐오의 기분을 넘어 너무 절실해서 사무치는 느낌이었다. 난 약간의 고기를 먹었다. 목이 메었다. 고기를 씹으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껴야했다. 그게 힘들었다. 고기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뭔가를 씹어 삼키고 나니 먹먹하던 슬픔과 허무함이 풀어지며 기운이 나는 듯했다. 그러나 질정 없이 흔들리는 마음은 다잡지 못했다.
 
 그가 부르던 쑥대머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를 처음 만났던 곳도 소리 모임이었으니 그와 판소리는 떼놓을 수 없을 듯하다. 바쁜 일정을 쪼개 내던 시간이라 자주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나오는 날은 언제나 떠들썩하며 행복의 파편이 튀는 듯 소란스러웠다. 거구의 그가 너털웃음을 웃으면 그의 눈이 작아지며 얼굴이 온통 커다란 꽃송이처럼 환했었다.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며 유정했던 그가 떨어진 꽃처럼 아깝고 아쉬웠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루니
호접몽을 꿀 수 있나
 

춘향이 이도령을 그리워하며 전전반측 잠을 못 잤듯이 우리도 한동안 그가 그립고 그리워 잠을 잘 수도 꿈을 꿀 수도 없을 것 같다.
 
 그의 장지가 소양에 있는 송광사라 했다. 송광사라면 멀고 깊지 않아서 좋았다. 유독 꽃이 많던 송광사에 그가 안식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주사바늘 꽂을 데가 없어 발가락까지 주사를 맞았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다 지나갔으리라.
 
 새벽녘 진혼곡을 바치듯 그를 생각하며 쑥대머리를 불렀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을 보고지고
 
이화일지 춘대우로 내 눈물을 뿌렸으니
야우문령 단장성에 비만 많이 와도
임의 생각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춘향은 올 수 있는 이몽룡을 기다렸지만 우리는 올 수 없는 그를 기다린다. 그러나 보인다고 다 사랑하지 않듯,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가 없어도 아니 그가 없기 때문에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때론 선명하게 때론 희미하게 우리를 마주할 것이다. 천년이 지난 듯 벌써 그가 보고 싶다.
 
고 이상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최화경<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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