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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왕과 금산사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4/06 [06:32]



13만 대군을 몰고 온 소정방, 나당 연합군은 백제 사비성을 AD660년에 함락을 할 때 김춘추는 무능한 두 여왕을 제치고 이미 강력한 왕(태종무열왕)이 되어 있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그렇게도 원하던 고구려 정복을 백제가 망한지 8년 후인 668년에 그의 아들 고종에게 멸망을 당한다. 신라는 3국을 통일했다지만 당의 야욕에 7년 간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며 당이란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의 넓은 땅을 거의 다 빼앗겼다. 견훤(甄萱)의 후백제(892-936)와 궁예의 태봉국(왕건-후고구려) 그리고 망해가는 신라 등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상주고을을 다스리던 아자개의 아들인 견훤은 용맹하고 지혜가 출중하여 신라의 비장으로 활약을 하다가 후백제를 일으킨다. 견훤왕이 개국을 할 때 나주에 도읍을 정하려 했으나 나주는 왕건가의 개성상단과 너무나 밀착해 있어 나주를 버리고 완산주(전주900년)로 옮기게 된다. 견훤은 신라의 수도 경주 포석정에서 주지육림 속에 술잔치를 하던 경애왕을 살해(927년)하고,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 군을 물리칠 정도로 3국 중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견훤왕은 남중국의 오월(吳越)뿐만 아니라 925년 북중국의 후당에도 사신을 보냈는데 견훤은 이처럼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맺는 등 지나날 백제의 해상왕국답게 후백제의 입지를 강화하는 한편, 이를 통하여 주변의 호족들의 인심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정략을 폈다. 936년 정월 후당에 사신을 보냈는데, 당시 후백제의 왕은 신검으로 935년 3월에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는 등 정치권력에 의한 내부지란에도 외교는 지속되었다. 935년 3월 막내아들(9남)능예, 딸 쇠복, 애첩 고비녀와 함께 금산사 미륵전에 유폐되어 파달 등 30여 병사의 감시를 받는다. 견훤은 이미 69세의 노쇠한 나이에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장남 신검이 차남 양검, 3남 용검과 모의해 아버지를 금산사 미륵전 지하실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뒤 왕위에 오른다. 사위 박영규 등이 병사들에게 술을 마시게 한 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견훤 일행은 그해 6월 금산사를 탈출을 한다. 지금의 동진강 상류인 태인천에 배를 대기하여 동진강 하류를 무사히 빠져 나간 견훤왕 일행은 계화도 앞바다와 변산반도를 돌아서 나주포의 고려 장수 유금필을 만나 귀순을 하게 된다.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 9월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렇듯 역사적으로도 유서 깊은 금산사 미륵전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62호로 지정되었다. 금산사 미륵전은 높이 11.82m의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장륙전, 용화전, 산호전이라고도 불린다.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 3층에는 미륵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서로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내세를 구할 미륵불의 세계를 뜻한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로 되어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겉모습은 3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3층이 통체로 되어있다. 웅장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금산사 미륵전은 국내 유일의 3층 목조건물로 불교 건축의 꽃으로 보고 있다. 금산사는 599년(백제 법왕 원년)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졌다고 전해지지만 창건 기록이 모두 불에 타버려 확실치는 않다. 그 후 진표율사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년)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년)까지 중건했으며 1069년(고려 문종 23년) 혜덕왕사가 88당 711칸으로 재건하면서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가람이 되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미륵전, 대공전, 광교원 등과 산내 암자 40여 개소가 소실되었다. 그 후 1601년(선조 34년)부터 1635년(인조 13)에 이르러 복원되었다. 또한 고종 때 미륵전, 대장전, 대적광전 등을 보수했으며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 금강문, 미륵전 등을 중수했다. 현재 남아 있는 주요 건물은 미륵전(국보 62호), 대장전(보물 827호), 대적광전, 명부전, 나한전, 보제루, 일주문, 금강문 등이며 석연대(보물 23호), 혜덕왕사진응탑비(보물 24호), 오층석탑(보물 25호), 방등계단(보물 26호), 육각다층석탑(보물 27호), 당간지주(보물 28호), 북강삼층석탑(보물 29호), 석등(보물 828호)을 비롯해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202,304㎡에 이르는 금산사 일대는 2008년 12월 사적 496호로 지정되었다. 천년고찰 금산사는 모악산 서쪽 기슭에 김만경의 넓은 들을 바라보며 위치해 있다. '금산'과 '모악'은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뜻이다. 모악산이라는 이름은  '엄뫼'에서 유래한 것으로, 높은 산을 뜻하는 '어머니의 산악'이라는 의미가 있는 모악(母岳)이 되었다. 크다는 뜻의 금(金)을 금산(金山)이라고 부른다. 우뚝 솟은 엄뫼 모악산(809m)은 어머니의 품안처럼 포근한 산자락에 거찰 금산사(金山寺)를 안은 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000년 전 후백제 견훤왕이 머물다간 금산사의 넓은 경내와 진입로 주변에 수천 그루의 왕벚나무가 봄이면 탐스러운 꽃이 피고 질 때 바람에 흰 눈이 날리듯 그야 말로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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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4/06 [06:32]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