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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새만금일보 기사입력  2018/05/17 [13:32]


 영화 ‘1987’을 감상했다. 1987년 초,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라는 당국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진상이 폭로되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가 확대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어 민주화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잊을 수 없었던 나의 1987년을 되돌아 보았다.
 
 1987년 전국에서 시위가 계속 일어났다. 그때 당시 나의 직장이 있는 김제에서 시위가 일어나면 그 시위에 대비하려고 우리는 퇴근시간 이후에도 비상근무를 했다. 또한, 시위가 일어날 것이란 정보만 입수되어도 공무원인 우리는 휴일에도 어김없이 비상소집을 당했다.
 
 그해 휴일 어느 날이었다. 남편은 주말농장에서 일했고, 나는 남편에게 가지고 갈 새참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는데, 직장동료는 비상이니 빨리 나오라 했다. 우리 사무실에는 전주에 사는 직원이 4명이었다. 비상이 걸리면 우아동에 사는 직원이 택시를 잡아타고 김제까지 가는 중간, 중간에 한 사람씩 태우고 다 같이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에는 밭에 있는 남편에게 연락할 시간도 방법도 없어 간단한 메모만 남기고 비상소집에 응했다. 밭에서 새참을 기다리다 지친 남편은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집에 와서 내가 써놓은 쪽지를 보고 화가 났었나 보다.
 
 우리는 사무실에 모여서 특별한 일 없이 만약의 사태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군 회의실에 다녀온 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난 목소리로 갑자기 여직원들은 집에 돌아가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우리는 좋아하며 집으로 왔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니 직장 분위기가 이상했다. “새참을 가져온다던 아내가 연락이 안 되니 무슨 상황이냐? 살림하는 여자를 휴일까지 불러낼 만큼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 있느냐?”며 어제 군수실에 어느 여직원 남편이 전화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여직원들을 급히 퇴근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여직원이 누구인가에 대한 추리였다. 그 대상은 남편이 농부일 거란 추측이었다. 다행히 우리 남편은 직업이 농부는 아니라 나는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아무 말 않고 있었다. 비밀은 없는 법, 결국 내 남편이라고 밝혀졌다. 그 뒤부터 비상근무를 하면 여직원들이 내게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네 남편에게 빨리 전화 좀 하라고 해”
 1987년 그해는 정말 시위가 격렬했었다. 학생은 물론 시민들도 시위에 가담했고,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했다. 시위 도중 한꺼번에 연행된 많은 사람의 응급처치를 위하여 우리는 김제경찰서에까지 파견 나가서 상처 처치를 해주기도 했었다.
 
 그해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대회’ 집회에 참여한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과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건은 시민의 분노를 끌어올리며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6월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울에서 벌어진 대규모 집회의 열기는 전국 시·군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로 빠르게 퍼져나가며 전국적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로 이어졌다. 결국,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겸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는 6월 29일 호헌조치철회와 대통령직선제를 약속하고 ‘6·29 민주화선언’을 하며 시민에게 굴복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열기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대항한 정의롭고 용감한 국민의 피땀으로 일궈낸 값진 승리의 열매로 독재에서 민주화로 내딛는 힘찬 발걸음이었다. 벌써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최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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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5/17 [13:32]  최종편집: ⓒ 새만금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