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체제의 사례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7/05 [15:49]

냉전 체제의 사례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7/05 [15:49]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한반도 냉전 체제에 과연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북미회담은 현대사에 기록될‘세기적 만남’이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세기의 회담’들이 있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국가 주석을 만났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회담을 했다. 이들 회담은 모두 쉽게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 시작된 냉전시대 대립 축을 허무는 시발점이 됐다.

1971년 7월15일 세계는 경악했다. 닉슨이 중국 방문 계획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과 중국은 서로를 적국으로 인식했다. 양국은 한국전쟁에서 교전했고, 외교 관계도 전혀 없었다. 1972년 2월, 닉슨은 베이징으로 향했다. 불안한 비행이었다.

닉슨은 출발 당시까지 마오쩌둥을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8일 동안 이어진 닉슨의 중국 방문 성과는 엄청났다. 베이징에서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했다. 저우언라이 총리와는 만리장성, 상하이, 항저우 등을 함께 다니며 대화했다.

방문 7일째인 27일, 미·중 양국은‘상하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국 관계 정상화를 지향하며 군사적 갈등을 완화하고 상호 교류를 확대하기로 약속했다.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철수 문제, 대만의 지위 문제 등 민감한 이슈로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러나 서로 한 발씩 양보해 파행을 피했다. 두 나라는‘소련을 견제한다’는 데에 입장이 같았다. 정상회담의 두 공신은 헨리 키신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저우언라이 총리다. 이들은 양국 정상을 잇는 가교 역할을 톡톡히 했다.

키신저는 1971년 파키스탄 방문 중 비밀리에 베이징을 찾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을 만났다. 여기서 닉슨의 중국 방문이 합의된 것이다. 물론 정상회담의 성공은 양국 정상의 의지가 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닉슨은 취임 초부터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며 외교 채널을 열었다.

적극적으로 대화 의사를 알린 것이다. 마오쩌둥도 1971년 미국 탁구 대표팀을 초대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닉슨의 중국 방문 일정 첫날인 21일 두 정상은 베이징에서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닉슨의 방문 중 두 나라는 서로를 존중했다. 중국 매체들은 평소에 쓰던‘미 제국주의 세력’대신‘미국’이라는 표현을 썼다. 닉슨은 공항에 영접 나온 저우언라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저우언라이는 1954년 제네바에서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에게 악수를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중국 지도부는 이때의 굴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닉슨이 먼저 손을 내민 순간 응어리는 풀렸다. 닉슨은 훗날 중국 방문이“세계를 바꾼 일주일”이었다고 자평했다. 그 뒤 닉슨은 1974년‘워터게이트’로 실각했다. 마오쩌둥도 1976년 타계했다. 그러나 두 정상의 역사적 만남은 7년 뒤인 1979년 드디어 성과를 냈다.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이 이뤄진 것이다.

한편 그 뒤 미소 정상회담도 열렸다. 문제는 미소 정상회담은 미중 정상회담과는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의 회담장을 나서는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표정은 어두웠다. 핵 군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고 입장이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정상은 아무런 합의도 도출하지 못했다. 레이캬비크 회담은 실패였다. 그러나 이 실패한 회담이 훗날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다. 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처음 만난 것은 198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다.

이는 이듬해 레이캬비크 회담으로 이어졌다. 두 정상은 당시 공멸(共滅)을 부르는 핵의 공포를 절감했다. 군비 축소가 꼭 필요하다는 데도 입장이 같았다. 두 정상은 1986년 10월 11~12일 이틀간 정상회담을 가졌다. 10년 내 양국의 모든 핵무기를 없앤다는 구체적 합의 직전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합의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회담이 실패한 것이다. 레이건이 추진했던 이른바‘스타워즈’계획이 문제였다. 고르바초프는 요격 미사일을 우주에 배치하겠다는 미국의 전략방어구상(SDI)을 포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수용되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 차이는 분명했다. 다만 두 정상은 서로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후속 회담으로 이어지는 열쇠가 된 셈이다. 양국은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합의에는 실패했지만 인간적 교감을 맺는 데는 성공한 것이다.

회담은 긴장 속에 끝났지만 두 정상의 관계는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내고 대화한 덕분이다. 한편 정상들 사이 인간적 교감의 중요성은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두 정상은 회담 후 서로를 혐오했다. 케네디는“내 인생 최악의 경험이었다. 그런 인간은 처음 봤다”고까지 밝혔다. 반면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달랐다. 두 사람은 레이캬비크 회담 이듬해인 1987년 워싱턴에서 다시 만나 중거리 핵무기 폐기 협정에 합의한다.

4년 뒤인 1991년에는 레이건의 뒤를 이은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가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그리고 두 나라 핵무기를 감축하는 전략무기감축조약에 서명했다. 오랜 기간 이어진 긴장과 갈등을 단 한 번의 회담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실제로 최종 합의까지 가는 데는 일정 부분 과정이 필요하다.

북·미 정상회담에 필요한 것은 인내다. 회담이 전면 실패로 끝난다면 퇴로가 막힐 수도 있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이다. 확고한 합의 도출만을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된다. 상호교류 지속 등 달성 가능한 목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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