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시인 김소월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7/12 [17:24]

민족시인 김소월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7/12 [17:24]



우리나라 현대시인 중에서 제일로 꼽는 시인은 북녘 땅 평북 정주출신 김소월(1902-1934본명:김정식)이다. 소월은 시의 흐름에는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 개성이 돋보이는 시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그것은 슬픔과 그리움과 체념을 주제로 한 우리민족의 정서와 한(恨)이 서린 구구절절한 감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33세란 짧은 생애를 마친 소월은 암울했던 일제시절에 자기영혼을 시작에만 불을 태웠다. 소월은 남산초등학교(南山初等)學校)4년과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다니던 중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중등학교에 편입한 3년이 그의 학력 전부다. 오산학교 시절에 물산장려운동을 벌였던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植)교장과 서춘(徐椿)·이돈화(李敦化)·김억(金億)을 스승으로 삼아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의 슬픔과 배일감정과 민족 사랑을 배웠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서 자수율보다는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으며, 민요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독창적인 율격으로 평가된다. 또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女性話者)의 목소리를 통하여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불러 일으켰다.

내성적인 차분한 성격은 스승 김억의 시풍에 영향을 받았으며, 문단의 벗으로는*벙어리삼룡이, 물레방아의 작가인 나도향(羅稻香)이 있다.

소월은 불운하게도 2세 때 철도부설 시 일본 인의 폭행으로 아버지가 정신질환에 시달려 사랑을 못 받고 컷 으며, 장성하여 조부의 광산 일을 도왔으나 사업의 실패로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동아일보지국을 개설, 경영하였으나 또 다시 실패한 뒤 염세증에 빠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 작품 활동도 뜸해졌고 생활고 까지 겹쳐, 생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여 1934년에 고향 곽산에서 천재적인 시인은 아편을 먹고 자결을 하고 만다. 그의 대표적인 주옥같은 시는 진달래꽃,초혼,산유화,못잊어,접동새,먼 훗날 등이 노래 가사로 널리 불러져 소월의 시혼이 우리 곁을 친근하게 맴돌고 있다. 그의 시 두 편을 소개해 보련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부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위의 두 시 중에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시 주제가 소절마다 뒤에 따라붙어 거듭 반복되고 있는데도 전혀 거부감 없이 연결고리가 되어 오히려 감흥을 되살리며 이상야릇하게도 가슴을 찡 울리는 누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듯한 미련 속으로 빠져 든다. 두 번째 *부모는 대중가요로도 많이 불러진 노랫말이지만 소월의 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는 않다. 기나긴 동지 섯달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잠 안 오는 깊은 밤에 오두막집 가난한 어머니와 함께 지난날의 옛 얘기를 나누며 부모의 마음을 알려면 ‘너도 자식을 낳아 봐야 알 것이다.’라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뜻과 기다림이 내포되어 스스로 불효자식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 시다.

소월은 서구(西歐)의 데카당적 시상(詩想)과 이국적(異國的)인 언어 형식(言語形式)만이 풍미하던 시대에 독특하게도 토속(土俗)의 이미지와 전통적인 7·5조의 민요풍(民謠風)의 리듬 속에 동양(東洋)의 심상(心象)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민족 시인이다. 반세기가 흐른 뒤 소월은 1981년 예술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시비는 서울 남산에 세워져 있다. 소월에 버금가는 2인자라 칭하는 남쪽 전라도 고창 출신 *서정주(1915-2000)는 대동아 전쟁 시 조선청년들이여 성전(聖戰)에 나가라 선동했으며,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창씨개명과 함께 친일에 앞장섰다. 서정주의 대표작인 *국화 옆에서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노란국화는 일본 황실을 미화한 것이며, 소쩍소쩍 소쩍새는 조선인을 비하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K교수는 서정주를 친일파 시인이라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였다.

 

소월보다 13세나 아래인 미당은 고승 박한영을 따라 입산했다가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수업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壁)으로 당선되었고, 김광균, 오장환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신라정신이 시적 주제로 자기인생관을 정립했다하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승자의 기록을 문학적 성취를 시도하였다. 서정주는 일제 강점기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의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수록 되었다. *아리랑의 작가며 미당의 제자인 조정래가‘선생님? 잘못된 친일에 대해 사과할 용의가 없습니까?’하니 목침을 던졌다고 한다. 미당이 떠나던 해 2000년도에 금관문화훈장까지 받았지만 반성 없는 친일에 대해서는 역사는 뭐라고 할까. 부안이 낳은 신석정 시인은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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