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뚱은 누구인가(2)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7/23 [00:36]

마오쩌뚱은 누구인가(2)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7/23 [00:36]

모택동(毛澤東.1893-1976)은 1949년 공산당 정권인 중국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국가 주석을 지낸 인물이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 문화대혁명, 톈안문 사태 등으로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정치 지도자로 꼽힌다. 마오쩌둥은 그의 사상은 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맞게 수정한 것이다.

레닌주의와 비교하여 마오쩌둥주의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1959년 국가 주석을 사퇴하고 중국공산당 당주석이 되어 이후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공산당을 장악했다. 1958년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대약진 운동을 시행했다.

농촌을 구성하는 수많은 집단농장이 통합되어 인민공사가 설립되었다. 사유지를 없애고 기술보다는 노동력에 의존하는 등 산업 형태를 노동집약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농업 생산량이 극심하게 감소해 2천만 명 이상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결국 대약진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마오쩌둥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그는 1959년 4월 국가 주석직을 사임했다. 이로 인해 류샤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등이 정국을 주도했다.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를 끌어들여 이들을 실각시킨 후 부주석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특권 계급에 대한 인민들의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대대적인 대중 운동을 시작했다. 바로 1966년에 시작되어 10년간 지속된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대혁명, 통칭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다. 이는 사회주의 대중 운동인 동시에 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권력 투쟁의 일환이었다.

그는 중국 각지에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1,300만 명에 이르는 홍위병을 조직했다. 이들을 자신과 대립하는 공산당 지도자들과 맞서는 데 이용했다. 홍위병들은 스스로 혁명가임을 자처하며 마오쩌둥의 사상을 전파하고,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압박하고 처형했다.

공산당 정부의 토지개혁 운동으로 지주들은 땅을 빼앗겼다. 농민들에게 구타당하곤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1976년 4월 톈안먼 사건으로 몰락했다. 이 사건은 마오쩌둥의 가장 큰 실책으로 꼽힌다. 1976년 4월 4일 베이징 톈안먼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다음 날 마오쩌둥의 퇴진 및 사인방(왕훙원, 장춘차오, 장칭, 야오원위안 등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4인의 중국공산당 지도자)을 비난하는 구호와 함께 교통마비, 방화 등 도심 한가운데서 소요가 일어났다.

마오쩌둥과 공산당 당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무력 진압하고, 덩샤오핑을 실각시키는 기회로 사용했다. 그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은 그해 9월 9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문화혁명 4인방은 체포되어 역사의 단죄를 받아야 했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인물로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인물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마오의 마지막 20년 집권 형태를 놓고 볼 때 문화대혁명은 발생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전체 업적에 대한 평가는 마지막 집권기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게릴라전을 바탕으로 한 투쟁노선을 설정해 내전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그로 인해 국민정부를 전복시켰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시키는 데 마오쩌둥은 대단한 기여를 했다.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산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중국인들은 팽배했던 불공정과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에 의한 국토 유린 등으로 굴욕감이 컸다. 따라서 마오의 중국통일 업적은 충분한 평가를 받는다. 그는 1949년 9월 "우리는 봉기했다"라고 말했다.

반면 두 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마오의 목표는 대체로 칭송할 만한 것이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은 과감하고 상상력이 넘쳤으나 대체로 자멸적인 것이었다.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정확한 수치로 제시하기는 어렵다. 내전 중에 희생된 수백 만 명의 죽음을 놓고 여전히 논란이 있다. 그래도 공이 과를 덮고도 남는다는 평이다.

마오는 구 소련의 악명 높은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냉전 시기의 냉혹한 공산주의 정치가로도 평가된다. 그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이론가로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천하를 얻기는 했지만, 동시에 집권 후 엄청난 과오를 저질러 수억의 인민들에게 최악의 고통을 선사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차지할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 라는 중국 격언을 스스로 증명한 사람이다. 현재까지도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현대 게릴라 전술을 완성한 군인, 대륙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정치지도자, 농민을 혁명의 주력으로 내세운 중국식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사상가, 뛰어난 문장력을 자랑하는 저술가이자 시인이면서 수천만을 굶겨 죽인 학살자이다. 그는 여전히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신화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마오의 정책과 정반대 정책을 실시한 덩샤오핑도 "마오쩌둥의 공과는 7 : 3"이라고 주장한다. 그를 신화적 위치에서 끌어내리지는 않은 것이다. 소련에는 스탈린이 없어도 블라디미르 레닌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 비판이 가능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위상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그 어떤 인물로도 대체 불가능한 수준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비판이 민감하다. 그러나 집권 이후에 과대망상적이고 급진적인 시책으로 국가에 재앙을 가져온 것을 보면 왕망이나 동탁이나 수양제 수준이다.

중국 역사의 맥락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웅과 역적의 일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애증이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모든 위안화 앞면에는 모택동이 그려져 있다. 천안문 광장에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인민해방군 군가는 마오의 기치를 언급하는 기사가 있다.

(정복규 기자)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국제정세의 어제와 오늘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