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문화대혁명(2)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8/19 [10:04]

중국의 문화대혁명(2)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8/19 [10:04]



마오쩌둥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다. 그는 가장 중앙집권적인 독재자였던 진(秦)의 시황제를 연상케 한다.

문화대혁명은 부패를 일거에 척결하기 위한 보다 과감한 새로운 정책으로서 마오가 앞장서서 주창한 것이다. 마오의 권위에 감히 도전했던 지도층 내의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적인 운동이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는 류사오치도 있었다. 그는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사했다.

문화대혁명은 농촌에 살던 수많은 인민들을 비켜가기는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정책이 끊임없이 변경되었다. 마오의 마지막 10년은 파리 코뮌을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의 선언문으로 개막되었다.

문화혁명은 공식적으로 1977년 8월에 개최된 11전대회에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죽음과 1976년 가을 4인방의 숙청과 함께 끝났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고 그해 10월에 행정·경찰·군부 지도자들의 연합에 의해 4인방이 숙청되면서 1977년에 비로소 덩샤오핑이 복권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마오쩌둥의 죽음과 문화혁명의 종결과 함께 300만 명에 가까운 당원들과 억울하게 숙청된 많은 사람들이 복권되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에 과감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그 뒤에도 문화혁명의 후유증은 계속 중국의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심각한 세대 간의 갈등도 그 중 하나다. 10대와 20대 초반에 문화혁명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불만이 있으면 거리로 뛰쳐나가는 법을 배웠다. 당과 정부 내부의 부패도 문제다. 마오쩌둥이 죽은 뒤 문화혁명의 목적과 결과가 모두 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다.

한편 1970년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의 후 마오쩌둥은 린뱌오에 대한 경고의 일환으로 천보다를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천보다는 1970년 8월에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 1971년 9월 린뱌오가 죽으면서 사태는 절정에 달했다.

중국 정부는 린뱌오가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소련으로 탈출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린뱌오가 죽은 지 몇 주 만에 고위 군사령관들이 모두 숙청되었다. 린뱌오의 죽음은 문화혁명 기간에 마오쩌둥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환멸감을 느끼게 했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추진한 최고위급 인물이었다. 그러나 린뱌오가 암살을 계획했다가 탈출했다는 추악한 사실이 상세히 알려지자 문화혁명이 파렴치한 전형적인 권력투쟁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중국인들이 자기들은 그저 개인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교묘히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린뱌오의 사망으로 처음에는 저우언라이가 가장 큰 이득을 보았다. 그는 1971년 후반부터 1973년 중반까지 중국을 다시 안정된 상태로 되돌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교육제도의 부활을 장려했고 쫓겨났던 수많은 사람들을 복귀시켰다.

중국의 무역이 다시 증가하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가 다시 증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 착수했던 경제의 전진이 계속되었다.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 이러한 총체적인 움직임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을 시작할 당시에 추구했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이의가 제기되지나 않을까 우려를 했다.

그 뒤 1972년 내내 마오쩌둥은 심한 뇌일혈로 고생했다. 저우언라이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1973년 초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을 권력에 복귀시켰다. 저우언라이는 그를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추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기간에 급진파의 손에 숙청된 인물들 가운데 2번째로 고위직에 있던 희생자였다. 그가 다시 등장함으로써 장칭과 그의 추종자들은 필사적으로 더욱 급진적인 노선을 확립하려고 했다.

1973년 중반부터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을 때까지 장칭을 비롯한 그녀의 지지자들과 저우언라이·덩샤오핑 집단 사이에서 중국의 정치권력이 왔다 갔다 했다. 왕훙원(王洪文)·장춘차오(張春橋)·야오원위안(姚文元)은 장칭의 지지자들로 훗날 4인방으로 불리게 된다.

1973년 중반부터 1974년 중반까지는 급진주의자들이 상승했다. 그들은 저우언라이와 그의 정책을 비판할 목적으로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運動)을 전개했다. 그러나 1974년 7월이 되면서 경제침체와 점점 커지는 혼란으로 마오쩌둥은 다시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을 지지했다.

저우언라이의 병세가 악화됨에 따라 1974년 여름부터 1975년 늦가을까지 덩샤오핑의 권력이 더욱 커졌다. 1975년 늦가을에 급진파는 덩샤오핑의 정책으로 인해 결국은 문화혁명과 마오쩌둥 자신이 거부당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마오쩌둥에게 심어주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대자보를 통해 이들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도록 재가했다. 대자보는 그 후 급진파가 즐겨 이용하는 선전매체가 되었다. 1976년 1월에 저우언라이가 죽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승인 하에 공식적으로 숙청되었다.

장춘차오(張春橋)와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상하이 코뮌을 설립한 직후인 1967년 2월 마오를 방문했을 때 마오는 '우두머리'(지도자)를 철폐하라는 주장은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이고 가장 보수반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언제나 "우두머리가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71~1972년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주축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의 가치관과 1966년 이전의 정치·경제 질서 사이에 일종의 절충이 시도되는 듯했다. 그러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전에 이 같은 절충은 실패로 끝났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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