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성주지맥의 장수 성주산(930m), 두문산(741.8m)

장계 진산으로 추앙받는 성주산, 문필가들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두문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09/06 [16:10]

백두대간 성주지맥의 장수 성주산(930m), 두문산(741.8m)

장계 진산으로 추앙받는 성주산, 문필가들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두문산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09/06 [16:10]

    

▲ 호덕마을 뒤에서 본 성주산, 두문산,     © 새만금일보
    



성주산聖主山은 예로부터 임금이 산제를 지냈거나 성인이 살았던 신령스런 산으로 추앙받아 왔다. 성주산 서쪽에 위치한 두문산斗文山은 사슴뿔 형상으로 이산의 정기를 받아서 문필가들이 끊임없이 배출된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의 기록을 보면, 진안군 동향면의 성주산에서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산제를 지냈고, 진안군 정천면의 성주산에서는 성주께 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충남 보령에 있는 성주산에서는 성인이 살았다고 한다.

성주산은 예로부터 장계의 진산으로 추앙받아왔던 산이다. 1927년 발행된 <<장수지>>를 비롯한 <<장수 옛 읍지>>, <<장계지>>,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 등에 “성주산은 군의 북쪽 30리에 있다. 한 줄기가 하나의 방향으로 내리 뻗으면서 계내(장계면)의 진산을 이룬다.”고 나와 있다. 백두대간의 장수덕유산은 성주산의 아버지 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선조들로부터 장계의 진산으로 추앙받아 왔던 성주산의 고유지명이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전라북도 전도>, <장수군 행정지도>, <<한국지명총람>>, <<한국지명유래집>>, <<장수군지>> 등에는 깃대봉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이는 장계현이 폐현되면서 장계현에 대한 역사와 주요한 산천山川에 대한 기록도 사라졌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성주산 정상에 표준기를 세우고 측량을 했다는 이유로 깃대봉으로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도 성주산을 깃대봉, 또는 두문산斗文山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깃대봉은 성주산으로 바로 잡아야 선조들에게 면목이 선다. 또한 압곡봉이나 악호봉은 선조들이 불러왔던 두문산의 고유지명으로 고쳐야 한다. 1927년과 2000년에 발행된 <<장수지>>와 <<장수의 옛 읍지>>에 “두문산斗文山은 군의 북쪽 40리 어전於田리의 바로 남쪽에 사슴의 뿔처럼 서있다. 문필가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나온다고 한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전라북도 전도>, <장수군 행정지도>, <<한국지명총람>> 등에는 압곡봉鴨谷峰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압곡봉이란 명칭은 이 산의 북쪽에 있는 계북면 압곡마을에서 취한 이름이다.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에는 “호랑이가 선비에게 호덕虎德마을의 터를 잡아줬다 하여 악호봉岳虎으로도 부른다.”고 나와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장수군행정지도>,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 등에 수비재로 표기된 지명도 소비재로 바로 잡아야한다. 김일한 씨 등 지역주민들에 의하면 백두대간에서 뻗어오던 산줄기가 이곳에서 뚝 떨어졌다가 성주산으로 솟구쳐 오르는 이 고개가 소의 목 부분 또는 소의 목에 가로 얹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멍에 형상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소비재, 또는 쇠비재로 불렀다. 또한 <지형도>에 솔재, 솔고개로 표기된 지명도 솔개형상인 솔개고개로 바로잡아야한다. 솔재나 솔고개는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

1769년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로 고찰해 본 성주산의 산줄기는 이렇다.

백두대간 장수덕유산에서 서쪽으로 분기된 산줄기가 문성산에 이르러 성주지맥과 삿갓지맥으로 나눈다. 문성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성주지맥은 소비재를 지나 성주산을 일으키고, 두문산(압곡봉), 집재, 수락봉(추락봉), 추락봉(상여덤), 시루봉으로 뻗어간다. 물줄기는 북쪽은 계북천, 남쪽은 장계천을 통하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장수군 장계면 송천리, 명덕리, 계북면 농소리의 경계를 이룬다.

<<한국지명총람>>, <<한국지명유래>>,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 등으로 살펴본 성주산 주변의 인문지리는 이렇다.

성주산(깃대봉)에서 북쪽의 무주 봉화산 봉수, 남쪽의 장계면 수락봉 봉수 등이 한눈에 잡힌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산들이 그렇듯이 깃대봉의 인근에 있는 파곡, 문성, 어전마을 주민들은 성주산(깃대봉)에는 예전에 불을 피워 신호를 보냈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다.

성주산의 남쪽에 위치한 장계長溪는 옛적에 한 씨가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한들韓坪으로 불렀다. 큰들(한들)에 자리잡았다 하여 대평리로도 불렸다. 그 뒤 상대와 하대로 분리되었다.

문화文化마을은 1998년 새로이 조성된 문화마을은 북동과 신동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장계천을 따라 그 양쪽에 장계면 소재지가 조성되어 있다. 문화마을과 주변의 논에서 원삼국시대 토기편과 방추자 편이 수습되어 장계천을 따라 양쪽으로 형성된 충적지에는 원삼국시대의 생활유적이 자리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북동(후하대) 마을은 장계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북쪽으로 장계 우회도로가 생겨 발전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서동(전하대) 마을은 장계리 중심지의 서쪽에 있어 서동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 남쪽으로 장계천이 흐르고 있다. 신동마을 장계면 소재지인 장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장계천을 경계로 동동과 접해있다.

중동(중하대)마을은 장계리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어 중동으로 불린다. 기러깃들은 중동 서쪽에 있는 들로 지형기 기러기가 모래 밭에 앉은 형국이라고 한다.

신기新基(새터)마을은 입구 다리에 두 개의 입석이 마을의 평화와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워져 있다. 서쪽에는 서변마을, 우측에는 월강리 도장마을이 접해 있다. 무지바우는 물어러지기 위에 있는 바위로 옛날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물어러지기는 마을 동쪽에서 반석 위로 물이 떨어져 나오는 곳이다. 연묵재는 이 마을에 있는 강당으로 조선 말엽에 선비 안분재, 김태형, 하대진, 김태연 등이 계를 짜서 강당을 짓고 글을 가르친 곳이다.



<문화유적과 명소>

[유물산포지]

송천리 고분이 위치한 서변마을에서 남동쪽에 있는 신기마을 북서쪽 산 능선에 있다. 신기마을과 동장골 마을을 나누는 골짜기가 학당골인데 이 가운데 서쪽 능선의 동쪽 사면이다. 도굴로 인해 민묘가 훼손되었으며, 고려 시대 이후 고분이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근처 밭에서 분청사기, 청자편 등이 수습되었다.

[성주산, 깃대봉 봉수]

월강리 신기마을 북동쪽에 있는 성주산(깃대봉)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성주산은 진안과 무주지역에 자리한 봉수까지도 조망된다. 북동쪽의 할미봉 봉수, 남동쪽의 장수 봉화산 봉수, 서쪽의 수락봉 봉수 등이 한눈에 잡힌다. 봉수와 관련된 유구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으나 정상부가 평평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기벽이 두꺼운 회청색 경질토기편이 수습되어 봉수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산행안내>

o 1코스 : 집재(나치)-두문산(압곡봉)-성주산-소비재(수비재) (4시간)

 

<교통안내>

o 익산-포항고속도로 장수나들목-장계-19번 국도-집재(나치)

o 익산-포항고속도로 장수나들목-장계-26번 국도-명덕삼거리-743번 지방도-소비재

 

/김정길 <전북산악연맹 부회장,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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