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기령당 기로연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0/24 [00:56]

전주 기령당 기로연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0/24 [00:56]



전주 기령당(耆寧堂)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경로당으로 완산동 언덕배기에 자리잡고 있다. 기령당이 최근 창립 제421주년을 맞았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인명록비 제막식 및 기로연 행사를 실시했다.

이상칠 당장은 기념사를 통해“421년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경로문화를 향상시키고 계승하는 기령당 당장으로서 기령당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기령당이 전주의 중요한 역사문화공간으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고 계승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1938년 건립된 기령당사적비에 따르면 1899년 부중의 인사들이 모여 부사청건문에 양로당을 처음 창설했다. 1921년 진사 이건호가 완산동에 있는 가옥과 대지를 기증해 기령당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1929년 옛 군자정 건물과 터를 기증받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기령당」은 일종의 경로당이면서도 60세 이상 지역 유지들이 회원이다. 전주에 새로 부임하는 공직자들은 반드시 이곳에 들려 부임 인사를 한다. 기령당(耆寧堂)의 '늙을 기(耆)'는 60세를 가리킨다. 회원 자격이 60세 이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노인 노(老)'는 70세를 뜻한다. 대문에 걸려 있는 '耆寧堂(기령당) 편액은 설송 최규상의 글씨다. 최규상(崔圭祥)은 전북 김제 출신의 서예가다. 본관은 전주, 호는 춘곡(春谷)·설송(雪松)·설하(雪霞), 자는 백심(伯心). 초명은 규하(圭夏)로 지었으나 후에 보근(輔根)이라 불렀다.

호는 처음에는 춘곡으로 불렀다가 전주로 이거하며 설송으로 불렀고, 말년에는 설하라 하였다. 당호는 노하당주인(老霞堂主人) 또는 취묵헌주인(醉墨軒主人)이라 하였다. 최규상은 1891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낸 문성공 최아(崔阿)의 22세손이다.

아버지 최보열은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난 유학자로서,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에 있는 무성서원의 도내 장의(掌議)와 만경군 도헌(都憲)을 지냈다.

기령당(耆寧堂)은 어르신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팔작지붕의 건물이 있다. 뒤에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송석정이 있고 본채 오른쪽에는 부속건물이 있다. 기령당은 '1610년(조선 광해군 2년)에 중건'했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됐다.

마당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연수정(延壽井)' 비석 자리에는 아마도 우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당에 있었던 보호수인 노거수(老巨樹)는 몇년 전에 태풍 피해로 고사(枯死)했다.

기로연(耆老宴)은 조선시대 기로소에 등록된 전·현직 문신관료들을 위해 국가에서 베풀어주는 잔치다. 기로연에는 정2품의 실직(實職)을 지낸 70세 이상의 문과 출신 관원만 참여할 수 있었다. 잔치에는 왕이 술과 1등급 풍악을 내렸다.

조선시대의 기로연은 1394년(태조 3) 한양 천도 후 태조 자신이 60세의 나이로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학문과 덕행이 높은 늙은 신하들을 모아 잔치를 베푼 것이 처음이었다. 태조는 또 잔치 비용 마련을 위하여 토지·노비·염분(鹽盆) 등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 잔치는 예조판서가 주관하여 준비하였고, 왕명을 받은 승지가 특별히 파견되어 감독하였다. 잔치에 참가한 문신들은 먼저 편을 갈라 투호(投壺)놀이를 했다. 진 편에서 술잔을 들어 이긴 편에 주면 이긴 편에서는 읍하고 서서 술을 마셨다. 이 때 풍악을 울려 술을 권하였다.

태조·숙종·영조와 고종과 같이 나이 많은 왕들은 직접 이 잔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기로소(耆老所)는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다.‘기(耆)’는 연고후덕(年高厚德)의 뜻을 지녀 나이 70이 되면 기, 80이 되면‘노(老)’라고 하였다.‘기소(耆所)’또는‘기사(耆社)’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경로당과 같은 친목기구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부터 독립관서가 되었다. 여기에는 왕도 참여했으므로 ≪대전회통≫에는 관부서열 1위로 법제화하였다. 기로의 모임은 중국의 당·송 시대부터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신종·희종 때 문하시랑을 지낸 최당(崔讜) 등이 치사(致仕)한 뒤 유유자적을 목적으로 기영회(耆英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시대 태조가 나이 60세가 되던 1394년(태조 3)에 친히 기영회에 들어가 서쪽 누각 벽 위에 이름을 썼다.

아울러 경로와 예우의 뜻으로 정2품 이상 실직(實職)의 문관으로서 70세 이상 된 사람의 이름을 어필로 기록한 뒤 전토와 노비·염분 등을 하사하였다. 1419년(세종 1) 2품 이상의 기로들이 전함재추소라는 명칭에 불만을 품고‘기로소’나‘기로재추소’로 명칭을 바꾸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뒤에 상정소에서 의논해 1428년(세조 10)에 치사기로소로 개칭되고 이것을 줄여 기로소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직·현직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을 기로소당상이라 했고 인원의 제한은 없었다.

초기에는 문신이 아니거나 70세 미만인 자도 들어간 예도 있으나 이는 제도로서 확립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그 뒤에는 입소 규정이 매우 엄격했다. 문과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들어간 사람은 조선 중기 허목(許穆) 한 사람뿐이었다.

숙종은 59세에,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각각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최고령자로 98세의 윤경(尹絅), 97세의 이구원(李久遠), 96세의 민형남(閔馨男) 등을 꼽을 수 있다.

기로소에서는 봄·가을 두 차례 기로연을 열고 명부를 관리하는 등의 일 외에는 직무가 없었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다. 청사는 서울의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으며, 1394년에 건축하고 뒤에 증축하였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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