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장수 할미봉(1026.3m)

할미봉수와 명덕산성을 품은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1/02 [10:57]

백두대간, 장수 할미봉(1026.3m)

할미봉수와 명덕산성을 품은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1/02 [10:57]
▲ 수락봉에서 본 할미봉     © 새만금일보
              
삼국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며 격전지였던 할미봉은 험준한 암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정상에는 테뫼식 석성인 명덕산성과 봉수역할을 하였던 불씨로가 동서남북에 네 개가 있다. 할미봉 정상에서 서쪽의 장계방향으로 내려오면 일명 대포바위 또는 남근바위로 일컫는(길이 2.5m, 직경 1.3m)의 바위가 비스듬히 장계 쪽을 향하여 서 있다. 이 대포바위가 장계를 향하여 있어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큰 대포로 알고 되돌아가 장계면 쪽으로는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대포바위     ©새만금일보

  할미봉은 명덕산성에 군사들이 먹을 쌀을 쌓아놓은 합미성合米城이 변음되어 할미성 또는 할미봉으로 불린 듯하다.
  할미봉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전라북도 전도>, <장수군행정지도>, <<장계지>>,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에 등재되었지만, <<한국지명총람>>과 <<한국지명유래집>> 등에는 할미봉에 대한 기록이 없다.    
 <<장계지>>의 할미봉 봉수와 명덕산성불씨로明德山城種火爐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할미봉수’는 장계면 명덕리 남덕유산 남쪽에 있으며, 주민들은 할미봉(합미봉)으로 부르고 있으며, 불을 피워 신호를 보내는 터가 있다. 정상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가면 돌로 쌓은 석축이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 유물은 정상부의 평탄한 지형에서 회청색 경질토기의 고배편, 구연부편, 동채부편이 수습되었다.

▲ 수락봉에서 본 할미봉과 백두대간     © 새만금일보

   ‘명덕산성’은 남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험준한 준령이 전북과 경남의 도계를 이루는 제일 높은 해발 1026m(할미봉을 지칭함) 정상에 있다. 이 성지에서 서쪽 8부 능선에 폐광된 수연광산이 있다.  
  1769년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우리전통지리서인 <<산경표>.와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고찰해본 할미봉의 산줄기는 이렇다.
  백두대간이 백두산 백두봉을 출발해서 북한지역의 두류산, 마대산, 백암산, 오봉산, 금강산 등과 남한지역의 향로봉,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추풍령 등을 거쳐 전북 땅의 삼도봉, 대덕산, 덕유산 백암봉, 무룡산, 장수 삿갓봉, 남덕유산, 장수덕유산을 지나 할미봉에 닿는다. 그리고 백두대간은 남쪽의 육십령, 구시봉을 지나 영취산으로 뻗어간다. 물줄기는 서쪽은 장계천을 통하여 금강으로 흘러들고, 동쪽은 낙동강의 지류인 진주 남강으로 흘러든다.
 행정구역은 전북 장수군 장계면 리와 장계면 명덕리, 경남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와 경계를 이룬다.

▲ 계북에서 본 백두대간 할미봉     © 새만금일보

 지리적으로 장수덕유산의 북쪽은 장수덕유산과 남덕유산, 삿갓봉과시루봉 그리고 덕유산연봉들이 용틀임을 한다. 동쪽은 서상의 월봉산이 다가오고, 남쪽은 백두대간의 구시봉, 덕운봉 너머로 영취산과 백운산이 눈앞을 가득 채운다. 남서쪽은 백화산 너머로 장안산이 우뚝 서 있고, 서쪽은 성주산(깃대봉), 두문산, 너머로 금남호남정맥과 성수산이 하늘금을 그린다. 
  <<장수의 마을과 지명유래>>의 할미봉 주변에 대한 인문지리는 이렇다. 
  백두대간 서쪽 기슭의 참샘 터는 삼지三地 옥토가 자연농지를 형성하였으며, 할미봉 기암절벽과 지하광물은 동양 제일 큰 관광 개발적지다. 이처럼 아름답고 청정한 자연환경 속에 양삼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영남 과객들이 묵고 갔다는 곳이 할미계곡 물이 합류하는 삼거리 숲 속이라고 한다.       

▲ 오동리에서 본 할미봉(김탑수)     © 새만금일보

양삼陽三마을은 양지마을과 삼거리마을에서 취한 이름이다. 반송盤松마을은 반석 위에 큰 소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수연을 캐는 광산촌으로 광부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충청도, 경상도 등 전국에서 외부에 온 500여명의 광부들이 광산에 종사하였고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이북 오도민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에서 탐사를 한 뒤 소와전공주식회사에서 소덕광부터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덕유광산(육십령 쪽), 장수광산을 차례로 채굴하였다. 이들 광산에서는 일제 강점기 징용을 기피하기 위하여 노무종사자로 3천여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 대부분의 광산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굴병(심폐증)으로 죽거나 다른 일을 찾아 이곳을 등졌다


<문화유적 및 명소>
▲ 육십령     © 새만금일보

[육십령 六十嶺]
 전북 장수군 장계면과 경남 함양군 서상면과 잇는 고개다. 육십현, 육복치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도적떼가 많아서 이 고개를 넘으려면 60명이 모여야 한다고 해서 육십령이라 했다. 영남지방의 주요 교통로로 조령, 죽령, 팔량치 등과 함께 영남지방의 4대 령으로 꼽아왔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였다. 함양사근산성(사적 제152호)· 황석산성(사적 제322호) 등 삼국시대의 성곽들이 남아 있다. 장수군에서는 육십령에 주민쉼터로 1997년 휴게 공간 3천여 평을 개발해서 기념탑과 정자를 세우고 지역특산품판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 육십령 충혼탑     © 새만금일보

  [육십령 충령비]
  1950년 한국전쟁 직후 국군 8사단, 수도사단에서 덕유산지구 공비토벌을 위해 산화한 국군영령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1954년 6월 16일 장계 남산공원에 세웠다. 그 뒤 백화여고 설립으로 1991년에 덕유산이 인접한 육십령으로 이전하였다. 비문에 “육군 소령 신창식 이하 55명은 덕유산 지구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고이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의병장 김동신의 묘]
  지리산을 무대로 영호남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의병장으로 창의도원수로 불리는 김동신이다. 그는 1871년 충남 회덕군 탄동면에서 태어나 1906년 홍천에서 기병한 민종산의 부하로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의병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뜻하지 않은 병을 얻어 고향에 숨어 치료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 끝에 1933ㄴ녀 조국 광복의 통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유족의 신청으로 늦게나마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받았다.   
 [김해 김씨 지비] 평지마을 숲속에 있는 이 비는 김해 김씨 김중건의 딸이 이순양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일찍 죽었다.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으며 칠성단을 두어 지극정성으로 천지신명께 기도하여 시어머니 눈을 뜨게 했다.

▲ 육십령서 본 할미봉     © 새만금일보


<산행안내>
o 1코스 : 육십령-할미봉-장수덕유산-남덕유산-장수덕유산-할미봉-육십령(16.0km, 8시간)
o  2코스 : 장계면 명덕리 반송-광산지-할미봉-육십령(4km, 2시간 30분)
o  3코스 : 육십령-할미봉-육십령(3km, 2시간)
  백두대간 종주는 육십령에서 할미봉, 장수덕유산, 남덕유산 삼거리, 동업령, 덕유산 백암봉, 신풍령으로 이어지는 30km의  장거리산행이다. 장수방향에서는 명덕리에서 광산 터를 지나 할미봉으로 오를 수 있다. 또 동명이나 토옥동계곡에서 장수덕유산과 할미봉을 거쳐 육십령이나 원점회귀 산행도 가능하다.

<교통안내>
o 익산-포항간고속도로 장수나들목-19번 국도-장계-26번 국도-육십령
         할미봉 대포바위

/김정길 <전북산악연맹 부회장,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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