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는 누구인가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1/19 [09:39]

진시황제는 누구인가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1/19 [09:39]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는 진(秦)나라다. 최초의 황제는 진시황제(秦始皇帝,기원전 259~기원전 210년)이다. 그의 성은 영(嬴), 이름은 정(政) 혹 조정(趙政)이다. 장양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상방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秦)나라의 제31대 국왕의 자리에 즉위했다. 새로 진나라 왕이 된 시황제는 친정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아버지 때 상방이 된 여불위가 섭정이 되어 국사를 돌보았다. 여불위는 마음대로 국사를 휘둘렀다.

심지어는 시황제의 어머니 조태후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여불위는 노애라는 자신의 수하를 환관처럼 꾸며 조씨의 처소로 보냈고, 조씨는 노애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다. 조씨는 노애와 함께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거처했다.

기원전 238년에 시황제가 성인식으로 잠시 함양을 비우자,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시황제는 곧바로 군사를 파견하여 노애를 능지처참에 처하고 어머니 조씨를 감금했다. 노애와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2명도 살해했다.

시황제는 여불위를 상방의 자리에서 내치고 자결을 강요했다. 결국 여불위는 자결했으며 시황제는 비로소 친정을 시작한다. 전국 통일 과정은 이미 시황제가 즉위하기 이전인 장양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 장양왕이 기원전 250년 주나라 정벌, 즉 진주전쟁에서 승리하여 정복 병합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230년부터 시황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을 위한 통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기원전 221년에 드디어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시황제의 나이 40세에 전 중국 땅을 마침내 통일했다. 시황제는 국왕(國王)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했다.

시황제는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 합쳐서 황제(皇帝)라 칭했다. 자신은 황제의 자리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의 의견을 따라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다.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군마다 수(행정 장관), 위(사령 장관), 감(감찰관)을 두었다. 천하의 부호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켜 산업도시로 발전시키면서 그들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함양궁을 바꾸었다. 제2궁전, 제3궁전이 회랑으로 이어져 웅대한 궁전이 됐다. 전국의 농민을 사역에 동원하여 폭 50m의 황제 전용 도로를 만들었다. 시황제는 고관에게 정무를 맡기지 않았다. 법도 스스로 정하고 결재도 혼자서 했다.

기원전 213년 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였다. 연회 도중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승상 이사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결국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고 주청을 올렸다.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한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렸다. 화가 난 시황제는 조정안의 학자들이 수상하다며 무려 460여명을 잡아 들였다. 시황제는 이들을 모두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다.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그리고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부른다.

시황제는 북방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 임도로부터 동쪽 요동까지 만리장성을 쌓았다. 동원된 인부는 무려 150만여 명이나 된다.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시황제는 또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았다.

70여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하기도 했다.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 곳곳을 순행했다. 그 때마다 많은 협객들이 폭군 시황제를 죽이려 하였다.

시황제는 순행 때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그만큼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을 두려워한 것이다. 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한다.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뒤를 따랐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가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그 운석에 누군가가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즉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고 써놓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황제는 병으로 쓰러진다. 화가 난 시황제는 그 지역의 주민을 몰살했다고 전해진다.

시황제는 사구 지방에 이르면서 병이 매우 위독해졌다.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했다. 그리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한다. 기원전 210년 음력 7월 22일 진시황제 영정은 5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다.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않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하고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하라고 했다. 부소는 자결했으나 몽염은 의심을 품고 자결하지 않자 조고는 몽염을 일단 감옥에 가두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가 황제에 오르니 그가 진 2세 황제다. 원래 2세 황제는 몽염을 살려주려고 했으나 조고의 말을 듣고는 몽염과 몽의를 반역 혐의로 몰아 삼족을 멸한다. 한편 시황제는 자신이 만든 지하 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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