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비는 중국
역사 논쟁의 주인공이다.
지금도 중국에서
논쟁이 되고 있다.
악비는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인생만큼 곡절을 겪었다.
악비는
1162년 고종이
승하한 후 효종이 즉위하면서 복권되었고,
백성들은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받들었다.
남송 조정은
그에게 무목(武穆),
충무(忠武)의 시호를
내리고,
악왕묘라는
사당을 지어 추모하는 등 크게 추앙했다.
하지만
1271년 몽골 족의
원나라가 건국되면서부터 그는 다시 경시되었다.
이런 풍조는
한족이 중원을 회복한 명나라 시대에 사라졌지만,
1616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다시 회복되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이 다스렸던 기간뿐만 아니라 비한족의 통치 기간도 중국 역사에 포함한다는 개념에서 2002년“악비는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민족 영웅이라 할 수 없다.”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악비는
12세기 초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와 맞서 싸운 남송의 명장이다.
중국의 역대
인물을 선정할 때에 당태종 이세민,
한무제
유철,
제갈량 등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차지한
바도 있었던 인물이다.
악비는 그 만큼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한족 출신의 명장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중국 교과서에서 평가가 절하되면서 중국인들의 집단적 반발을 사고 있다.
2003년
12월 중국은
갑자기 때 아닌‘민족영웅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악비는
중국사에서 간신 중의 간신으로 평가되는 송나라 재상 진회의 견제를 받아 39세에 반란죄를
뒤집어쓰고 독살 당했다.
그러나 후세에
충절과 공적을 인정받아 사후 70년
뒤에는‘악왕’으로
추서되었다.
그런 악비를
현재 중국 당국에서 평가를 절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비가 평가
절하되고,
진회가
복권된다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가치 혼란으로 이어지는 일이다.
한족으로
이민족에 투항했던 오삼계와 같은 배신자들도 영웅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악비를
부정하게 되면 중국 과거사에서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침략 전쟁이 전혀 없었다는 대단히 비합리적인 논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악비를 송 이후
시대에도 줄곧 영웅시했던 것은 외부의 침략과 압박에 저항하는 정신을 존중했던 것이다.
그것을 존중하지
말라고 한다면 장차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지 말라는 말이 되는 셈이다.
결국 중국
당국은 중국 민중의 반발에 부딪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악비를 민족
영웅이라 부르는 것이 다른 민족의 감정에 영향을 줄까봐 이런 논리를 정리해 보급했다고 했다.
그러나 악비
논쟁은 중국 당국의 의도와 달리 도리어 한족 중심주의를 자극하는 일이 되었다.
오히려 내부
여러 민족 간의 혼란과 분열을 책동하게 될 것이 우려된다. 악비(岳飛.1103-1141)는 지금의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정강촌(程崗村)의 가난한
농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붕거(鵬擧),
이름은
비(飛)다.
그가 태어나던
날 고니같이 생긴 새가 그의 집 지붕 위에서 울다가 날아갔다 하여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악비는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좌씨춘추(左氏春秋)》와《손자병법》을 통해 유학과
병법을 익혔다.
특히 병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진광(陳廣)에게서 창술과
검술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에는 주동(周同)에게 궁술을
배웠다. 악비는
1122년 조정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 응시하여 진정부로(眞定府路)
선무사(宣撫司)의 소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1122년 부친 악화가
세상을 뜨자 군대를 떠났다가 2년 후에 다시
입대했다.
재입대할 때
어머니 요부인이‘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로‘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그의 등에 새겨 주었다. 악비가 살던
당시 송나라는 국운이 매우 기울어 있는데다 제8대 황제 휘종의
무능으로 인해 국내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송이
쇠퇴 일로를 걷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동북방에서는
여진족이 1115년 금을
건립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악비는‘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깃발을
하사받았다.
이후‘정충’은 오늘날
악비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악비는 도적
무리들을 무조건 토벌하지 않고 군인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군율을
엄격히 하는 한편 군사들을 식구처럼 보살피는 행동으로 군기를 잡았다. 당시 사람들은
악비의 군대를‘악가군(岳家軍)’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화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진회(秦桧)는 임안부로
돌아온 악비를 추밀부사에 임명하여 병권을 회수한 후,
감찰어사
만사설(萬俟卨)에게 그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그가 사직하도록 했다.
진회는 또
악비의 부장인 왕귀와 왕준(王俊)을 사주하여
악비의 다른 부장 장헌(張憲)이 악비의 아들
악운(岳雲)과 함께 병변을
일으켰다고 참소하도록 했다.
결국 장헌과
악운은 물론 악비까지 투옥되었다.
심문을 받으면서
악비는 자신의 등에 새겨진‘진충보국’문신을 내보이며
결백을 주장했다. 악묘에서
악비만큼 주목받는 인물이 진회(秦桧)다.
진회는 남송의
재상으로 주화파를 대표한다.
악비의 죽음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
중국인들에게‘대역적’으로 낙인
찍혔다.
악비의 가묘
근처에 진회와 그의 부인이 무릎 꿇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
1513년 진회상이
만들어진 이래,
중국인들이 진회
동상에 하도 침을 뱉어서‘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최근 악비와
진회를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민족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소지 때문이다.
한족에게는 분명
악비가 구국의 영웅이다.
그러나 여진족의
후손들에게는 그 반대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역사 교과서에서 악비를‘민족
영웅’이라 칭했던
표현을 삭제했다. (정복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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