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뿌리 준경묘 영경묘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2/04 [16:40]

조선왕조의 뿌리 준경묘 영경묘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2/04 [16:40]



조선왕조의 뿌리인 준경묘·영경묘(濬慶墓·永慶墓)는 강원도 삼척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 장군의 묘인 준경묘와 장군의 부인 이씨의 묘인 영경묘의 묘역이다. 조선 왕조 최고의 선대 묘로 꼽힌다.

고종 광무 3년(1899년) 공식적인 선조의 묘로 추봉(追封)하고 묘와 재각, 비각 등을 수축·정비했다. 두타산(頭陀山)은 고려시대 이후 꽤 이름이 알려진 명산이다. 조선 왕조의 태동을 비롯해 500여 년 왕조의 정기를 이을 수 있는 명당으로 평가받던 지역이다.

이양무(李陽武)는 고려시대 인물로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부친이다. 전주에서 대대로 살다가 아들인 이안사와 함께 삼척 활기리(活耆里)로 이주하였고, 여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년)까지 살았다. 부인은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강원도 삼척의 마을인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고총(古冢)이 그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까지 국가에서 이양무의 무덤을 확정하지 못했다. 그 뒤 고종 때 이 고총을 목조의 고비(考妣: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인정했다.

노동(蘆洞)의 이양무 무덤을 준경묘(濬慶墓), 동산의 부인 무덤을 영경묘(永慶墓)라 하여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시켰다. 준경(濬慶)과 영경(永慶)이란 묘호를 올리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1981년부터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봉양회(奉養會)가 설립되어 제향을 거행하고 있다.

준경묘는 조선왕조 건국과 관련된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설화가 전해진다. 이안사는 전주에서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피신을 온 뒤 자리를 잡고 산 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의 상(喪)을 당한다. 그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 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안장하여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고 말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더구나 금으로 만든 관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窮餘之策)을 찾아낸다. 소 백(百)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황금 빛깔의 밀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일설에는 귀리짚이란 말도 있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 밀집은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는 흰 얼룩소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다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그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밀집으로 대신하여 아버지의 장사를 치루었다. 결국 그래서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준경묘에서 4km 떨어진 곳에 영경묘가 있다. 문화재청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6필지 6만5천154m2 규모의 준경묘·영경묘(濬慶墓永慶墓) 구역을 2012년 7월 20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524호로 지정하였다.

1899년에 묘역을 조성할 때 각각의 무덤 가까이에 정자각을 만들었으며, 재실은 준경묘와 영경묘 사이에 있는 활기동에 건립하였다. 제향은 매년 청명일(淸明日)에 거행하였고 준경묘 헌관은 삼척군수, 영경묘의 헌관은 강릉군수가 맡았다. 현재 제향은 4월 20일에 거행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첫 용은 이안사 즉 목조를 가리킨다. 그가 살던 옛집 터는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재실 앞 강가 산자락에 지금도 남아 있다. 전주지방의 유력한 토착세력이었던 이안사는 당시 수령의 악정과 집권세력에 대한 불만이 컸다.

그래서 결국 170가구 추종 세력을 거느리고 외가가 있는 삼척으로 이주했다. 목조는 삼척에 17년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 중에 부모가 모두 사망해 삼척에서 장례를 치렀다. 지금은 마을 이름을 임금의 조상이 살던 곳이라 하여 '황기(皇基)'라 부른다. 집터는 '왕대(王垈)' 그리고 양묘는 '능(陵)'이라 부른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4대조 목조, 그리고 익조, 도조, 환조의 능과 함께 왕실에서 보존 관리한다.

한편 강원도 두타산(頭陀山)의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다. 그래서 전주이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평이다. 결국 조선왕조가 장자보다 중자들이 더 많이 계통을 잇게 되었다는 이야기기가 있다.

최근 전국의 문인 21명이 조선왕조 태동지인 준경묘·영경묘의 역사와 전설을 소재로 문학 창작집을 발간했다. 창작집 이름은‘저기, 삼척 경사스런 땅 - 소나무처럼 살아봐도 좋으리’로 했다. 조선왕실 묘역인 준경묘·영경묘에 얽힌 역사문화, 풍경, 숲 전경 등을 소재로 창작된 작품 47편이 실렸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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