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개혁과
개방으로 이끈 인물은 작은 거인’등소평(鄧小平,덩샤오핑)이다.
그는 극좌
노선을 고집한 모택동과는 달랐다.
실용주의자였다.
등소평의
사상은‘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다.“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이다.
등소평은
모택동이 주도한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이들과 함께 사회주의 경제 체제의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모택동의
재집권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며‘자본주의의
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장시 성으로 쫓겨 가 3년간 기계공으로
일해야 했다.
이때 등소평의
아들은 홍위병들에게 두들겨 맞아 반신불구가 되고 말았다.
등소평은
1973년
복권됐지만,
다시 권력
투쟁에서 밀려 실각하는 등 부침을 거듭했다.
그러나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고 모택동의 아내 강청(江靑,장칭)
등 문화
대혁명을 주도한‘4인방’이 몰락하면서
재기한다.
마침내 모택동의
공식 후계자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을 꺾고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를‘부도옹(不倒翁,오뚜기)’이라고
불렀다.
정권을 장악한
등소평은 개혁개방 노선을 선포한다.
1978년
12월
18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3중전회)에서였다.
169명의 중앙위원회
위원과 112명의 후보
위원들 앞에서 그는‘농업의
현대화,
공업의
현대화,
국방의
현대화,
과학기술의
현대화’라는
4개 현대화
노선을 발표했다.
제한적인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이었다. “사회주의의
잡초를 심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을 틔워선 안 된다.”라는 모택동의
유지를 정면으로 배반했다.
사회주의 체제
안에 자본주의를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등소평은
단호하고 결연하게 부르짖었다.“개혁개방과 민생
개선을 하지 않으면 어디로 가든 죽음의 길뿐이다.” 1979년
1월
28일 등소평은
미국을 찾았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미국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의
공산주의 지도자 이미지는 스탈린과 흐루시초프처럼 권위적이고 음험했다. 등소평은 이런
이미지를 말끔히 씻었다.
150센티미터를 겨우
넘는 작은 키의 등소평은 큰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로데오 경기장을 찾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러브 미
텐더〉를
불렀다.
포드 자동차와
보잉 항공기 등의 생산 현장을 방문했다.
인간미와
소탈함으로 미국을 친구로 삼았다. 개혁개방 정책은
급물살을 탔다.
등소평은 홍콩
맞은편에 있는 광둥 성의 선전을 경제특구로 지정해‘자본주의
실험’을
시작했다.
인구
3만 명의 어촌
마을은 대륙의 전진기지가 됐다.
훗날
860만의 인구를
거느린 대도시가 된다.
이어
주하이,
산터우,
푸젠,
샤먼,
하이난 성에
차례로 경제특구가 설치되었다.
풍부한 노동력과
값싼 인건비에 매료된 외국인들의 투자가 줄을 이었다.
상하이와 광저우
등 동부의 연해 도시들은 중국의 고속 성장을 견인했다.
1984년에 발표한
경제 개혁안은 가격을 시장 기능에 맡기고 기업인들에게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율권을 부여했다.
국영 기업을
민영화했고,
국가 소유의
토지를 수십 년간 개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등소평은
1985년〈타임〉지에‘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는〈타임〉과의
인터뷰에서“내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은 마르크스가 나를 미워해 벌을 내린 것”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개혁개방이 처음
시작된 1978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0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30년 뒤인
2007년에는
2,360달러로
12.5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대외 무역 규모도 105배
증가했다.
30년간 중국의
경제 성장률은 연평균 10퍼센트를
기록했다.
2001년 이후로는
14.5퍼센트라는
놀라운 수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정치
분야에서는 폐쇄적인 사회주의 통제 체제를 고집했다. 결국‘톈안먼
사태’가
일어났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일어났다.
모택동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무력 진압한 1차 톈안먼
사태와 구분해 이 사건을 2차 톈안먼
사태라고도 한다.
사 건의 발단은
정치 개혁을 추구하다 보수파 세력에 의해 숙청된 후 숨진 호요방(胡耀邦,후야오방)의 복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등소평은
시위대를 가혹하게 짓밟았다.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된 무자비한 진압이었다.“인민은
자유로워야 한다.”라며
1차 톈안먼
사태를 옹호했다가 배후 조종자로 몰렸던 등소평으로서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이었다. 톈안먼 사태로
개혁개방은 갈림길에 섰다.
그러나 등소평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1992년 상하이와
선전 등지를 순방하며 열정적으로 개혁개방의 가속화를 촉구한‘남순강화(南巡講話)’에
나섰다.
공산당
14기 전인대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확립을 당의 기본 노선으로 못 박았다.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개정 헌법에 국시(國是)로
명시했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이후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는 법안과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물권법을 차례로 통과시켰다.
1997년 등소평이
사망한 뒤에도 이러한 기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중국은
외형상으로는 여전히 공산주의 일당독재 체제를 굳건히 유지하는 가운데 자본주의적 발전을 병행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체제의
모순은 불안 요소로 남아 있다.
소득 격차와
양극화도 문제다.
등소평은‘잘 살 수 있는
사람부터 잘 살게 한다’는
선부론(先富論)을
내세웠다.
경제 규모와
국민 소득이 급속도로 커지고 경제특구로 지정된 동부 연안 지방은 풍요로워졌다. 반면 도시
빈민과 내륙의 농민들은 극빈 계층으로 전락했다.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
인권 수준은
여전히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마구잡이 개발로 인한 환경 파괴,
대기오염도
풀어야 할 숙제다. (정복규
기자) <저작권자 ⓒ 새만금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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