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발 장군의 생애와 업적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8/12/10 [09:46]

정발 장군의 생애와 업적

새만금일보 | 입력 : 2018/12/10 [09:46]


1592년 4월 14일(음)은 충장공 정발장군께서 수십 배에 달하는 왜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시다 부산진성에서 순국하신 날이다.
 충장공 정발장군 종친회와 관계기관에서는 장군이 기일인 5월 18일 장군님의 묘소에서 추모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한다.
이 행사에 맞추어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초개와도 같이 던지신 장군의 생애를 보면
정 발(鄭撥) 1553년(명종 8) ~ 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로, 계림군(鷄林君 ) 양경공(良景公) 희계(熙啓)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군수 명선(明善)이고 어머니는 함열 남궁씨로 감사 숙(淑)의 딸이다.
 연천군 미산면 광동리 너븐골에서 태어났다. 1579년(선조 12) 25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이어서 해남현감, 거제현령, 위원군수 등의 외직을 거쳐 훈련워의 부정(副正)과 사복시 내승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때 조정에서 일본군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기위해 공을 절충장군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로 삼았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왜장 고니시(少西行長)가 이끄는 18,000명의 왜군 1번대와 공은 부산진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대치하고 일진일퇴를 하였으나, 중과부족으로 후퇴하여 부산진성을 굳게 닫고 수성(守成) 명령을 내린 다음 만반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다음날인 4월 14일 아침, 약 1,000명이 지키고 있는 부산진성을 포위한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정발은 흑색갑옷을 입고 대궁(大弓)으로 적을 쏘아 맞추면서 군사를 지휘하며 독려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한낮인 정오경에 이르자 성의 북쪽으로 전력을 집중시킨 일본군의 전술에 화력과 수적 열세에 놓인 조선군의 방비가 무너지면서 참혹한 혈전이 이어졌고 적은 성안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물러서지 않고 분전을 계속하던 중에, 그만 적이 쏜 조총탄환이 장군의 투구를 뚫고 선혈이 온 몸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부장을 부축을 받으면서도 장군은 마지막으로 전투를 종용하면서 “싸워라!”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41세의 나이로 장렬히 순직하였다.
 장군의 순직을 옆에서 지켜보던 몸종인 용월(龍月)은 그 뒤를 이어 적진으로 달려 들어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고, 애첩(愛妾)인 애향(愛香) 역시 장군의 시신을 지키다가 옆에 있던 나무에 목을 매어 조선 여인의 절개를 지키며 죽는 등, 임란 개전 초 제1선에서 부산진성을 지키던 1,000여명 모두가 죽음의 투혼으로 적의 전의를 크게 상실시키며 장렬한 순국을 하였다.
 
조정에서 좌찬성에 추증하고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으며, 임란이 끝나고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충렬사(忠烈祠)에 병향(竝享)되었다.
또한 동래성 남문에 순절비와 전망유지비(戰亡遺址碑)가 세워졌다. 장군의 시신은 찾지 못하여 장군의 애마(愛馬)인 용상(龍嘗)이 생가까지 물고 온 갑옷과 투구로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 새릉에 의관장(衣冠葬)을 치렀다고 전한다.
 “ 아아! 공은 나라 사람들이 칭송하고 추한 왜인도  또한 칭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장군이 강토를 침략한 왜적을 맞아 어떻게 싸웠는지 알고 있다.  또 당시 왜군에 종군했던 포르투칼 선교사는 전쟁이 끝난 후 이렇게 증언하였다. 모두 용감했다. 전사할 때까지 싸웠고 병사들뿐만 아니라 부녀자 어린이들도 무기를 나르고 돌을 던지며 싸움을 도왔다. 백발의 노인은 쓰러진 북재비 대신 북을 힘껏 두드렸다. 마지막에는 칼과 창이 맞부딪히는 육탄전이 되었고 정발장군도 총탄에 쓰러졌다.
 임란이 끝나고 장군의 생가가 있던 광동리의 너븐골에는 조정에서 내린 불천위(不遷位)의 은전으로 별묘(別廟)가 건립되고, 광동리 마을 입구에는 충신 정려문이  6ㆍ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4 후퇴 당시 안타깝게 모두 소실되었다. 정발장군의 묘역은 1979년 9월 3일, 경기도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고, 1709년 권이진(權以鎭)에 의해 그려진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는 보물 제391호로 지정되어 현재 육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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