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천년과 전주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1/22 [16:53]

전라도 천년과 전주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1/22 [16:53]



지난 2018년은 전라도 탄생 천년이 되는 해였다. 전라도(全羅道)라는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이다.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릿 글자를 합쳐서 만든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1018년(고려 현종 9)에 전주목 권역인 강남도와 나주목 권역인 해양도를 합쳐 전라도라고 하였다.

전라도 탄생은 다른 도에 비해 1백년 정도 빠르다. 경상도와 충청도는 1106년(고려 예종 원년) 각각‘경상진주도’,‘양광충청도’라고 한 것이 시작이다.‘경상도’와‘충청도’로 지명이 확정된 것은 각각 충숙왕 원년(1314), 공민왕 5년(1356)의 일이다.

전라도는 도제(道制) 출범이 고려 5도 중에서 가장 빠르다. 고려시대 도제(道制)는 하위직인 5, 6품의 안찰사가 6개월을 임기로 도(道)를 순찰하면서 군현 수령들을 감독했다. 조선시대 고위직인 2품의 감사가 도(道)를 총괄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고려시대 안찰사영은 조선시대 감영의 전신이다. 나주는 고려의 어향(御鄕)이다. 태조 왕건의 세력 기반이기 때문이다. 태조비 장화왕후가 나주오씨다. 그 소생이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이다. 그래서 고려 건국 후 나주가 전남권의 중심이 되었다.

통일신라 때 전남권의 중심은 무진주(광주)였다. 그러나 광주는 고려 건국 후 나주에 전남권의 중심 자리를 내주었다. 그 뒤 다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1896년 전라도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나뉘면서이다. 전남도청이 광주에 설치되면서 광역시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전라도에는‘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농민혁명운동, 조선말의 전라도 의병, 민주주의를 갈망한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이 있었다. 전라도는 국가 위기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1897년 새로운 국호로‘대한(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그 연원으로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을 제시했다.

전라도는 삼한 중 마한의 중심이다. 전라도 땅은 동북아 국제교류와 경제, 문화의 관문이자 다양한 문명이 융합된 선진문화의 발신지였다. 청자와 선종의 발달, 고려 무신정권의 경제적 배경, 삼별초의 항거거점, 고려와 조선시대에 경상우도와 전라도의 세곡이 운반되던 조운항로 등 전라도 바닷길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육로였다.

전라도는 풍요의 땅이다. 호남평야와 나주평야처럼 광활한 곡창지대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대 저수지로 대표되는 벽골제 등이 만들어졌다. 일제가 군산과 목포를 통해 쌀을 수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후기인 1789년(정조 13)에 간행된‘호구총수’에 따르면 전주부의 호수(戶數)는 총 2만947호로, 한양·평양에 이어 전국에서 세 번째다.

한양·대구와 함께 3대 시장 중 하나로 주목 받기도 했다. 태인과 담양 등의 가사문학, 조선시대 사대부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소쇄원, 양반과 민중 모두 즐겼던 판소리의 본고장, 서화·음식·한지·출판 등은 전라도가 자랑하는 문화들이다.

전라북도는 전라도 정도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여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전라감영 복원이다. 전라감사의 집무실이었던 선화당 바로 옆 관풍각도 요즘 거의 틀을 갖췄다. 2019년 말이면 옛 전라감영을 이루는 주요 7개 건물이 다시 제 모습을 찾는다.

전라도 천년의 발자취를 기록하기 위한 천년사 편찬 작업도 한창이다. 오는 2022년까지 30권으로 정리될 예정이다. 천년의 역사 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의 천년을 내다볼 수 있는 그런 역사를 써야 할 것이다. 이들 사업과 함께 전라도 새천년공원 조성 등도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전라도 새천년공원 조성사업은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지 않아 중단됐다. 기념식과 학술대회, 특별공연 등은 일회성 행사다. 천년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기에는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전라도는 산업화에 뒤처지면서 과거의 영화는 크게 위축된 상황이다.

심각한 일자리 문제에 직면한 청년들은 앞으로는 외지로 떠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가 발전하기를 바라고 있다. 전라북도 여러 분야 순위에서 꼴찌에 있다. 후백제의 수도였던 전주는 조선시대 왕조의 본향으로 예우를 받던 특별한 도시였다.

호남평야와 서해 황금어장 등 넉넉한 경제력으로 문화 예술을 꽃 피운 곳이기도 하다. 경기전을 지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했고, 전주 객사를 제왕의 고향을 뜻하는 풍패지관으로 이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말에는 대한제국 선포한 후에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등을 조성했다.

황실의 뿌리라고 해서 이곳을 아예 성역화했다. 전라도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전주는 한양과 평양에 이어 조선의 3대 도시로 꼽혔다. 기름진 호남평야와 서해의 어족자원 등 넉넉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조선 중기 전라도는 국가 재정의 30% 이상을 담당했다.

풍족한 경제력은 예술과 음식문화를 꽃 피우는 원동력이 됐다. 전주의 한지, 부안의 청자, 남원과 고창의 판소리 등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산이 이 땅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과거 군사정권 시절 산업화에 소외되면서 전라도, 특히 전북은 낙후지역의 대명사가 됐다.

전라도 천년 역사의 중심은 전주였다.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전라도 일도를 통괄하였던 도내 최고의 행정기구 전라감영이 전주에 위치했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제주도까지 포함하였다. 제주도는 광복 후 1946년에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었다.

전주는 제주도까지 포함한 조선시대 전라도의 으뜸도시“호남제일성”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전주가 나주보다 더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안찰사가 머무는 전라도 안찰사영이 전주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안찰사는 직급은 낮지만 왕명을 받아 수행하는 도를 대표하는 관리였다. 전라도 천년은 전북의 자존심이다. 전라도 천년의 역사를 통해 전주와 전북인의 자존감을 세우고 미래 천년을 열어가야 한다.

(정복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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