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1018년 고려 현종 때이다. 강남도의 대표 지역인 전주와 해양도의 대표 지역인 나주의 지명에서 한 자씩을 취한‘전라도’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전라도의 명칭이 사용된 지는 1000년으로 전국 광역도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다. 전라도 출신의 인물들은 매우 다양하다. 왕인(375-384사이 출생~?) 박사는 백제의 학자로 전남 영암군 군서면 출생이다. 영암 월출산에서 유학과 경전을 수학해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됐다. 32세 때 일본 왕의 초청으로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됐으며 경서와 역사를 가르쳤다. 백제 문화를 전수해 일본 아스카 문화의 융성에 크게 기여했다. 도선(827~898) 스님은 전남 영암군 출생으로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불린다. 15세 때 구례 화엄사로 출가했고, 전남 광양 옥룡사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개설했다. 특히 풍수지리와 관련해 한국 풍수의 종조로 일컬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보고(?~846)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 무장으로 전라도 출신의 인물이다. 일찍이 당나라로 건너가 무령군 소장을 지냈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당나라 해적이 신라인을 노략해 노비로 사고파는 행위를 흥덕왕에게 보고했다.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해 해적을 소탕하고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임진왜란 당시 문인이자 의병장이었던 고경명(1533~1592)은 광주광역시 남구 출생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금산전투에서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과 더불어 순절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천일(1537~1593)은 전남 나주 출생이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이끄는 5만명의 관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게 활약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촉석루에 몸을 던졌다.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에 위치한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정여립(1546~1589)은 전북 전주 출생이다. 서인 출신이나 이이 등 서인을 비판해 관직에서 물러난 뒤 낙향해 대동계를 조직했다.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하는 등 혁명적 명제를 가지고 호남을 중심으로 새 세상을 열고자 했다.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을 품었다. 1589년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으로 피신했다가 자살한 뒤 모반죄로 몰렸다. 그와 가까운 동인 1000여명이 숙청당하는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이후 호남 전체가 반역의 향으로 낙인찍혀 정계로 진출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광주 북구 충효동 출생인 김덕령(1567~1596)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체구가 작지만 날래고 민첩하며 힘이 세 이에 관한 전설도 많이 전해 내려온다. 광주의 원도심 충장로는 김덕령 장군의 시호인‘충장’에서 따온 것이다. 윤두서(1668~1715)는 조선 현종~숙종대의 문인 화가로 전남 해남 출신이다. 호는 공재. 윤선도의 증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 유명한 화가를 뜻하는 삼재로 일컬어졌다.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등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말과 인물화로 유명하다. 작품으로 《자화상》《채애도》《백마도》 등이 전해진다. ‘녹두장군’전봉준(1855~1895)은 전북 출생이다.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해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지방 동학접주로 임명됐다. 농민의 입장에서 부패한 관리를 처단하고, 외국 군대 철수와 탐관오리 징벌, 노비제도 폐지 등 12가지 개혁안을 정부에 요구했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해 동학의 조직 강화에 힘썼다.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부하의 밀고로 체포돼 교수형을 당했다.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1863~1916)은 전남 보성군 벌교읍 출생이다. 30세가 되던 해 과거에 장원급제해 관료의 길을 걸었으나 1905년 일제의 침략 야욕에 항의해 사표를 던졌다. 이후 비밀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경술국치 후 흔들리는 민족정신을 바로 잡기 위해 단군 신앙인 대종교를 창시했다. 김좌진, 박은식, 김규식 등 수많은 애국 열사들이 대종교의 토양 위에서 커나갔다. 서재필(1864~1951)은 독립운동가로 전남 보성군 문덕면 출생이다. 1884년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가했고, 1896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발간된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위해 독립협회를 창설해 주권독립, 민권 운동을 위해 힘썼다. 근대 최고의 명창이라 불리는 송만갑(1865~1939)은 전남 구례군 구례읍 출생이다. 이른바 근대 오명창. 동편제 소리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명창으로 평가된다. 1923년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원불교 창시자인 박중빈(1891~1943)은 전남 영광군 백수면 출생이다. 한학을 수학하던 9세에 우주의 자연현상에 깊은 의심을 품고 수도에 들어가 20년 간 구도 끝에 원불교를 창립했다. 물질문명에 끌려가는 인류의 정신구원을 위한 종교운동을 시작했고, 1917년 저축조합을 만들어 허례 폐지와 미신 타파, 근검저축 운동을 펼쳤다. 허백련(1891~1977)은 동양화가로 전남 진도군 출생이다. 19세기 대화가인 허련의 후손으로 전통 남종화를 지향했다. 1936년 조선미술원을 설립해 전문적으로 미술을 가르쳤다. 무등산에서 다원과 농장을 운영하면서 도인풍의 생활 속에서 전통 남종화를 그렸다.《매월도》《산수도》등의 작품이 있다. 오지호(1905~1982)는 서양화가로 전남 화순군 동북면 출생이다. 근현대 화단에서 인상주의 화풍의 대표작가다. 추상미술의 개척자 김환기(1913~1974)는 전남 신안군 출신이다. (정복규 기자) <저작권자 ⓒ 새만금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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