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구 대첩(金溝 大捷)

새만금일보 | 기사입력 2019/02/27 [10:21]

금구 대첩(金溝 大捷)

새만금일보 | 입력 : 2019/02/27 [10:21]

 금구 싸움은 1597년(선조 30) 9월 14일에 금구현(金溝縣)에서 왜적과 조명 연합군 사이에 있었던 싸움을 말한다. 위의 남원성 전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왜적은 8월 16일에 남원 성을 함락하고  며칠 남원에 머물러 있다가 전주로 향하였는데  전주를 지키던 전주부윤 박경신과 수장 진우충 등이 모두 달아난 후였기 때문에 전투 없이 동월 25일에 전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들은 다시 뒤이어 전주성에 입상한 우군의 주력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북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9월 7일 우군(右軍)은 직산 전투에서 조선군에 패하여 남하했고 좌군도 한산과 서천에서 금강을 건너 용안 함열 익산을 거쳐 금구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왜적을 추격하던 전라도 조방장 원신과 김언공은서로 모의하여 금구에서 적과 일대 접전을 벌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왜적은 많고 우리의 군사는 적기 때문에 정공법으로 적과 접전을 벌이면 대단히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금구의 험로의 앞은 굴곡이 아주 심하고  쉽게 빠져 나갈 수 없었으며  뒷쪽은 아주 좁은 곳이라서 물러 설 수도 없었다. 즉 천년의 험로였다.
 조선군이 이 험로에 매복해 있는 사실도  모르고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그의 요장(僚將) 과도승무(鍋島勝茂)와 유천조신(柳川調信) 및 도진충풍(島津忠豊)과 함께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였다. 왜적이 험로에 도달하자 원신과 김언공은 많은 조선 군사가 추적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산봉우리마다 기치를 세우고 봉화를 올렸으며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어 소란스럽게 하고 매복해 뒀던 복병으로 하여금 급히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복병이 사라졌다가 조금 후에 다시 나타나 맹렬히 공격해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작전을 거듭 구사했다. 이와 같이 조선군의 갑작스럽고 변칙적인 공격으로 왜적은 혼비백산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에  여념이 없었다. 즉 앞으로 나가자니  굴곡이 아주 심하여  빠져나기가 어렵고  옆으로 비키자니 험산과 습지가 가로 놓여 있으며 뒤로 물러나자니 좁아서 움직일래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왜적들은 서로 얽히고 뒤범벅이 되어 칼로 찌르고 창으로 찔리기도 하였으며 말과 수레가 넘어지고 뒹굴어  아수라장이 됐다.  왜적이 이와 같이 혼란에 빠지자  조선의 군사들이  사납게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고 때리고 쳐서 많은 적을 죽였다. 겨우 살아남아 남으로 쫓기는 적들은 조총과 창들을 버리고 정읍으로 도망하였다. 이 금구싸움은 적에게  상당히 커다란 피해를 주었으며 마침 조선의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적에게 크게 이기자 적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남으로 퇴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적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남하했는데  이때 금구의 매복 장소에서의 복병이 일시에 일어나 적의 선두를 치게 됐다. 적은 앞으로 돌파하자니 국길이 위태롭고, 옆으로 비키자니 험산과 습지가 가로 놓여있었으며, 뒤로 물러서자니 너무 좁은 길이었다. 이때에 원신과 김언공의 군사가 뒤에서 나타나 고함을 치며 총통과 화전을 쏘아대며 적을 궤멸시켰다.
금구대첩 결과는 패한 왜군운 많은 사상자를 내고 창검, 조총 등을 내버린 채 퇴각하다가 다시 대오를 수습한 뒤 정읍을 들어갔다 왜군은 겨우 숨을 돌리고 대책을 의논했는데, 이를 정읍회의라 했다. 금구전투애서 혼비백산이 된 적장 이너가아시게노부(柳川調信),시마즈다다유타(島津忠豊)등은 정읍회의에서 남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전승을 금구지역에서는  왜통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왜통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과 이서면의 경게에 있는 구릉지대로 근래에 와서는 부르기 좋게 애통으로 변음 되었다. 금구대첩이 우리의 승리로 돌아간 이들 뒤에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우리 수군이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의 서해진출을 차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는 금구대첩은 일본과 명의 강화회의가 결렬되자 왜가 재무장하여 침략함으로써 전국 5도가 다시금 유린당할 위기에서 치러진 전투였다. 직산전투에서 패퇴하여 남하하는 왜군을 궤멸시킨 금구대첩은 왜군이 후방에서 힘을 축척하여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정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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